우리마을(7) 인계면 도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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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7) 인계면 도룡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7.2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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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 (7)

도룡리(道龍里)는 인계면 소재지다. 원래 호계면에 속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도사ㆍ평지ㆍ산직굴ㆍ팔학ㆍ정산ㆍ용암 마을을 합해 도사의 ‘도’ 자와 용암의 ‘용’ 자를 따서 도룡리라 했다. 도사ㆍ용암ㆍ정산ㆍ팔학 마을 등 4개 행정리가 속해 있다. 도룡리는 동쪽으로 마흘리, 서쪽으로 팔덕면 광암리, 남쪽으로 갑동리, 북쪽으로 쌍암리가 인접해 있다. 2020년 7월 14일 기준 인구는 206가구, 358명(남자 166ㆍ여자 192)이다.
 

마을 명칭 유래

인계면 도룡리는 도사ㆍ용암ㆍ정산ㆍ팔학 마을 등 4개 행정리가 속해 있다. 먼저 용암(龍巖)마을은 용샘바위(용암)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마을 뒤 선암산 아래쪽 기슭에서 오른쪽 105미터 지점에 거대한 바위가 있어 용암이라 하는데, 마을 이름도 용암마을이라 했다. 
팔학(八鶴)마을은 사리봉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돌아드니 학이 날아드는 형상과 같아 ‘파학’이라고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팔학’으로 발음하면서 팔학리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학 8마리가 짝을 지어 살고 있어 팔학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정산(鼎山)마을은 당초에는 계산마을로 부르다가 개산(또는 객산)마을이라 불렀고, 정산마을로 이름을 바꿨다. 처음 경주이씨가 터를 잡았으나 이후 남원양씨가 터를 잡고 대대로 살고 있으며 울산김씨, 청주한씨도 몇 호 살고 있다. 
도사(道士)마을은 원래 지명은 도솔리(兜率里)였다고 한다. 처음 마을을 조성할 당시 불교적 성향이 강한 가문이 태 자리로 삼으면서 도솔천(兜率天) 내 원궁(院宮) 같은 마을이 되도록 소망하면서 붙였는데 후대에 도사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용암마을 전경.
▲정산마을 전경.
▲팔학마을 전경.
▲도사마을 전경.

 

‘용샘바위와 장승재’ 전설

장승재(장성치)는 도룡리 용암마을에서 가성리 가성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다. 장승재 용샘바위(용천암)에는 전설이 전해 온다. 
아득한 옛날 장성재 중턱 옹달샘과 남쪽 계곡 참샘 물은 천상의 선녀궁에서 쓰려고 길어가던 감로수(甘露水)였다. 선녀궁에서는 매월 첫 진일(辰日) 자정, 사람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천상의 사자(使者)인 용을 이 옹달샘으로 내려보내 물을 길어 오도록 했다. 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이 외유 갔다 온다고 한 날짜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아낙은 그때부터 매일 밤 고갯마루에 올라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수 개월 계속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 이날은 매월 첫 번째의 진일이어서 용이 천상으로 물을 올려야 하는 날이었는데 아낙이 고갯마루에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하강한 용은 아낙이 그 자리에 잠이 들도록 하고 천상으로 물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고갯마루에서 선 채로 잠이 든 그녀의 꿈에 목메게 기다리던 남편이 초라한 모습으로 오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여보”하고 부르며 남편을 쫓아갔지만, 남편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눈앞에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상서로운 기운과 함께 물기둥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낙은 자신도 모르게 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소리치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그녀는 고갯마루에 선 채로 돌이 되고, 옹달샘에서 천상으로 물을 올리던 용도 그 자리에서 바위가 되어 버렸다. 
이때부터 돌이 되어 버린 아낙의 망부석을 장승이라 부르고, 그 고개를 장승이 서 있는 고개라 하여 장승재(장성치)라 부르게 되었다. 용이 바위가 된 자리에 깊이 70~80㎝, 지름 50㎝가량의 샘이 고였다. 이때부터 이 바위를 용샘바위라 부르고 있다. 장성재 남쪽 계곡에 있던 옹달샘은 지금도 참샘 또는 찬샘이라고 부른다. 
조선 후기까지 순창군 기우제는 대개 이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만큼 영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린 후 구시(오목하게 패인 구덩이)에 고인 물을 한 항아리 떠가고 나면 반드시 단비가 흡족하게 내려 목마른 대지를 소생케 했으니 군민들은 이곳을 하늘이 점지한 신령스러운 바위라 했다.


학송암 미륵

학송암 미륵은 팔학마을 개심사 터 부근에 있다. 개심사가 폐사된 후 남겨진 석불상을 마을 주민이 마을 미륵으로 섬긴 것이라 한다. 당시 미륵불은 불두가 절단된 상태였으나 주민들이 불두와 불신을 접합시킨 후 흰색으로 도색하고 학송암 미륵으로 봉안했다고 한다. 왼손에 약병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상으로 높이 약 220센티미터며 흰색으로 색칠한 상태다.
팔학마을 주민들은 정월 보름날 쌀을 챙겨서 학송암 미륵을 찾아가 불공드린다. 주민들은 사월초파일보다 정월 대보름과 백중(음력 7월 15일)에 학송암 미륵을 찾아가 불공을 드리는 관행이 있다. 주민들은 아들을 얻고자 빌었고, 동제날인 정월 열나흘에 밖에서 날을 지새우거나 남의 집에서 잠을 자면 좋다고 하여 학송암에서 자정을 넘겨 집에 오거나 아예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학송암 미륵은 고려시대 개심사라는 사찰에 있었던 불상이 훼손된 후 팔학마을 일대 주민들에 의해 기도 도량의 전통이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성과 변천 과정을 보여 주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학송암 미륵.

정산마을 들독

정산마을에는 1950년대 초반까지 큰 들독과 작은 들독 두 개가 있었다. 
들독은 단오나 백중 때 마을 머슴들이 품앗이할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시험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큰 들독을 든 머슴은 새경을 더 받았고 작은 들독을 든 사람은 새경을 적게 받은 데서도 알 수 있듯, 들독은 머슴의 체력을 시험하는 도구이자 임금 지급과 품앗이의 기준이 되었다. 
정산마을 앞 광장에는 정자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정자나무 아래에 들독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6ㆍ25 전쟁 이후 돌독 들기 관행이 중단되고 얼마 후 큰 들독은 자취를 감췄다. 작은 들독도 최근까지 모정 아래에 놓여 있었다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 아래 사진으로만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도사마을 돌탑

도사마을 돌탑은 청룡과 백호 뜸에 정확하게 조성해 놓은 풍수 비보 돌탑으로, 마을 앞 좌우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돌탑은 돔형으로 크기는 왼쪽 돌탑이 하단 지름 220센티미터(㎝), 높이 165센티미터이며, 오른쪽 돌탑은 하단 지름 220센티미터, 높이 135센티미터이다. 좌우 돌탑 모두 탑심이 있으나 돌탑에 묻혀 있는 상태다.

정산마을 돌탑

정산마을 돌탑은 마을의 수구가 넓어 풍수상 기(氣)가 빠져나갈 염려가 있자, 그것을 보전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조성한 수구막이 돌탑이다. 마을 남향 전면에 돌탑 2기 조성돼 있다. 두 돌탑 사이에 마을 숲(수구막이 숲)도 조성되어 있었으나 6·25 전쟁 이후에 없어졌다고 한다. 
두 돌탑은 마을 전면에 서 있는데, 마을 쪽에서 바라보면 좌측이 할아버지 돌탑, 우측이 할머니 돌탑으로 불린다. 할머니 돌탑은 새마을운동 당시 도로를 확장하면서 약간 옆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정산마을 돌탑은 원추형인데 할아버지탑은 탑심이 2개며, 할머니탑은 1개이다. 

팔학마을 돌탑

팔학마을 돌탑은 마을 터의 지기를 눌러 주는 압승형 돌탑이거나 수구막이 돌탑이다. 돌탑 3기가 세워져 있는데, 돔형으로 돌탑 상단 중앙에 작은 입석이 1기씩 세워져 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에는 당산제를 지낼 때 당산굿을 치면서 탑에도 굿을 쳐주었는데, 당산제가 중단된 이후에는 마을 의례보다 개인 치성으로 바뀌었다. 마을 부녀자 가운데 매년 정월대보름 밤에 돌탑에 제물을 차려 놓고 개인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도룡리 고인돌 떼

인계면 소재지 북서쪽에 있는 원통산 남동쪽 기슭 하단부에 산직마을이 있다. 산직마을에서 북동쪽으로 200미터 가량 떨어진 잡해미들 서쪽 구릉지에 도룡리 고인돌 떼 4기가 무리 지어 있다. 임실과 순창을 잇는 국도 27호선에서 100미터 가량 떨어진 구릉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도룡리 고인돌 떼는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양지천과 평행 되게 남북으로 방축 방향을 두었다.

▲도룡리 고인돌 떼.

정산마을 유래에 얽힌 전설

약 300년 전 선암산 아래 용샘바위 아래쪽에 경주이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사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시주승이 동냥을 오면 오히려 바랑을 빼앗을 정도로 욕심이 많고 인색했다. 한 도승이 이런 소문을 듣고 이 마을을 찾아 부자를 설득했다. 그러나 부자는 도승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도승은 말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부자에게 말했다. “시주승의 바랑을 뺏을 것이 아니라 저 앞산에 있는 바위 위의 돌을 굴려 버리면 더욱 큰 부자가 될 것인데, 겨우 불쌍한 시주승의 바랑을 뺏느냐? 그것이 얼마나 된다고.” 이 말을 들은 부자는 귀가 솔깃했다. 더 큰 부자가 된다는 말에 당장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바위 위의 돌을 굴려 버렸다. 그러자 큰불이 나 마을을 모두 불태웠고, 마을은 폐허가 돼 버렸다. 이 마을 터는 솥이 엎어져 있는 형상으로, 앞산에 있는 바위 위의 돌이 바로 가마솥 배꼽이었는데 그 배꼽을 떼어 버렸기 때문에 솥이 터져 솥의 기능을 할 수가 없어 불이 나고 마을이 패망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남은 마을 사람들이 아랫마을에 내려와 살게 되니 이 마을을 정산리(鼎山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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