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누정(1) 순창읍① 군청과 객사 주변에 있었던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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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누정(1) 순창읍① 군청과 객사 주변에 있었던 누정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7.2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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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읍 누정과 군청 앞 응향지, 응향각, 수옥루
순창 누정을 찾아서 (1)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거나 박물관에 전시된 문화재만이 소중한 것은 아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주변 문화유산에도 관심 두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것은 역사와의 대화이자 후손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순창 누정(樓亭)은 인간과 자연이 합일하는 공간이자 역사와 사연을 간직하며 순창 정신의 뿌리가 깃들어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열린순창> 500호 발행을 맞아 여러 고문서에 기록된 자료를 참고해 순창군에 존재했거나 현존하고 있는 누정을 살펴본다. 

 

▲군청과 응향지 주변에 있던 누정 추정도.
▲1970년대 초반 군청 모습. 연못의 모습이 정겹다.
▲순창초등학교 졸업식 기념사진. 뒤로 1938년 경 매각해 없어진 수옥루 현판이 객사에 걸려있다. 정봉애 제공

 

누정이란 무엇인가?

누정(樓亭ㆍ누각과 정자)이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다락식으로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만든 건축물이다. 일반적으로 누(樓)ㆍ정(亭)ㆍ당(堂)ㆍ대(臺)ㆍ각(閣)ㆍ헌(軒) 등을 일컫는 개념이다. 
삼국시대 왕실을 중심으로 조성된 누정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크게 확대되었다. 원래 방이 없이 마루만 있고 사방이 탁 트였으며,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건립했다. 누정의 기능이 다양화되면서 강학소(講學所)나 재실(齋室) 기능을 하는 방을 둔 누정도 생겨났다. 
옛사람들은 누정의 기본 요건을 수려한 자연이 어우러진 곳에 중점을 두었지만, 단순히 자연만을 즐기기 위해 짓지는 않았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위해 산림에 은둔한 선비가 지은 누정, 백성에게 각별했던 이를 추모해 지은 누정도 있었다. 시와 글을 짓는 공간이자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 무술을 익히는 도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순창읍 누정과 군청 앞 응향지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고려 말부터 일제강점기 때까지 순창읍에는 전망 좋은 곳곳에 여러 누정이 있었다. 관에서 지어 관리한 것도 있었고 개인의 소요처로 지었다가 군민에게 기증한 예도 있었다. 
1530년(중종 25)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순창군지, 여러 고지도 등을 종합해 보면 순창읍에는 군청 앞에 관정루(觀政樓)ㆍ수옥루(漱玉樓)ㆍ애련당(愛蓮堂)ㆍ응향각(凝香閣)ㆍ취홍정(翠紅亭)ㆍ하방정(荷芳亭)ㆍ화방재(畵舫齋)ㆍ화홍정(華紅亭) 등이 있었고, 객사(客舍)와 그 뒤에는 북루(北樓)와 만록정(萬錄亭)이 있었다. 
그리고 순창을 대표하는 귀래정(歸來亭)과 교용정(敎用亭)ㆍ귀미정(歸米亭)ㆍ누교(樓橋)ㆍ사정(射亭)ㆍ온진정(蘊眞亭)ㆍ육일정(六一亭)ㆍ호고재(好古齋)ㆍ효우당(孝友堂) 등 20여개의 누정이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순창 사람이 누정의 운치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 말까지 군청 앞마당에 있던 연못, 응향지(凝香池) 덕분이었다. 연못 주위에 응향각 등 여러 누정이 있었다. 응향지는 인접한 경천 물길을 대어 관아 서쪽 앞뜰에 조성한 연당(蓮塘ㆍ연꽃 연못)이었다. 초여름이면 흰 연꽃이 만발해 그 향취가 그윽했으며, 달 밝은 밤이면 문인들이 배를 띄워 시를 읊조리고 노닐던 명승지였다. 연못으로 통하는 큰 다리가 있었고, 주위에 대숲과 나무들이 둘러싸 그윽한 맛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대표 시조작가 이세보(李世輔)는 1860년(철종 11)에 아버지 이단화(李端和)가 순창군수로 있을 때, 순창을 유람하면서 시조 8수를 지어 《풍아(風雅)》라는 시조집에 남겼다. 그 가운데 응향지를 노래한 시조가 있다. 

응향지(凝香池) 선유(船遊)하니
-연화(蓮花)도 좋거니와
월영수영(月影水影) 은은(隱隱)한데
-가지마다 낙화로다
지금의 이적선(李謫仙ㆍ이태백)
-소자첨(蘇子瞻ㆍ소동파) 어디 간고


응향각

응향각(凝香閣)은 ‘감미로운 연꽃 향이 정자에 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정자였다. 백련을 심은 응향지(凝香池)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풍류처로 객사(客舍) 서편인 지금의 군청 앞에 자리했다. 
1651년(효종 2)에 임성익(林聖翊)이 순창군수로 재임할 때 지었고, 1746년 이익지(李翊之)가 순창군수로 있으면서 중축했다. 곡운(谷耘) 권복(權馥)의 《곡운공기행록》<남유록(南遊錄)>‘유상편’에 “순창 응향각은 동헌 곁에 있다. 집 아래에는 작은 호수가 있어서 연꽃이 많이 피어 있다”라고 적고 있다. 
응향각은 조선의 수많은 명사가 방문해 자취를 남겼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윤두수(尹斗壽)도 당시 전라감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순창에 들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당시 순창군수 고경명(高敬命)과 응향각에 오르고 시주로 그 감회를 나타냈다. 시조작가 이세보가 응향각과 화방재를 노래한 시조 4수가 남아 있고, 다산 정약용도 이 누각에 올라 그윽한 감흥을 풀어냈다.
아래 시는 1760년(영조 36)에 간행된 옥천군지를 모본으로 편찬된 순창군읍지 누정 제영(題詠) 부분에 실린 <제 순창응향각>(題 淳昌凝香閣)이다. 

높은 누각이 담백하고 허정하니
사람의 뜻을 저절로 표연케 하네
뜰의 나무는 바람서리로 주름져 있고
못의 연꽃은 달빛 이슬에 둥글어졌네
산이 밝아 벽화 같은데
가을에 작은 밭에선 곡식이 익어 가네
벼슬아치가 이곳에 숨어 있으니
거문고 소리 은은히 죽변에서 들리네


수옥루
 
수옥루(漱玉樓)는 응향지 주변에 있던 누정이다. 1938년 경 매각해 없어졌다.
2014년까지 객사 동대청 건물에 걸려 있던 ‘순화아문(淳化衙門)’이라는 현판은 원래 순창 관아 출입문이었던 수옥루 1층에 걸려 있었다. 
수옥루는 그 위에 있던 누각으로, 이곳에서 침이 떨어진 모양이 구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순창군지도’(규장각 보관)에 수옥루의 위치가 표시돼 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환여승람》,《순창군지》, 디지털순창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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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구독자 2020-08-01 22:42:29
이런 기사 참 좋습니다
다음호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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