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농부(7) 날씨가 참 거짓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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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농부(7) 날씨가 참 거짓말 같다
  • 차은숙 글짓는농부
  • 승인 2020.08.19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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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장마가 끝났다. 하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파란 얼굴에 햇살만 짱짱하다. ‘물폭탄’을 퍼붓던 하늘이 ‘불볕’을 쏟아내고, 호우 특보 대신 폭염 특보가 내렸다. 폭염 특보 속에 물난리를 겪은 하우스를 정리하려니 날씨가 참 거짓말 같다.
침수되기 전날에도 물을 퍼붓듯 세차게 비가 내렸다. 그래도 불안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문단속만 잘했다. 빗소리에 가끔 잠이 깼긴 했는데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는 다른 세상이었다. 마을 앞 너른 논이 온통 황토색으로 찰랑거렸다. 어르신들은 이런 비는 팔십 평생 처음이란다. 
그 빗속을 뚫고 하우스로 갔을 때는 물이 무릎 높이까지 들어찼고 그냥 쳐다보고 “어떡하지, 어떡해. 큰일 났네!” 하며 한숨만 되게 풀어놓고 돌아왔다. 난생처음인 물난리에 그야말로 하늘만 쳐다봤다. 거센 물결이 넘칠 듯 거칠게 흘러가는 사천도 무서웠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집에 물이 안 들어온 게 어디냐며 물이 빠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몇 시간 지나서 둑길까지 차 있던 물이 조금 빠졌다. 마을 앞에도 황토물 대신 원래 색깔인 초록이 점점 더 넓어졌다. 사천의 수위도 낮아졌다. 
하우스도 한나절이 좀 지나자 물이 빠졌다. 작업동 문을 열어보니 커다란 냉장고는 앞으로 넘어져 있고, 작업대며 소파도 자리를 옮겼다. 무거운 기계들도 흩어져 있었다. 우선 넘어진 냉장고를 일으켜 세우니 물에 흠뻑 젖은 포장박스가 눈에 띄었다.
종이박스는 손을 대기만 해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이고 속상해라. 작업동 바닥 여기저기 고인 물을 퍼내도 진창이다. 찰박거려 걷기도 힘들다. 그래도 넘어진 걸 세우고, 밀려난 물건들을 다시 제자리에 집어넣고, 흙탕물이 뒤덮인 물건들을 닦는다. 
물에 잠겼던 하우스 안도 엉망이다. 쨍쨍한 며칠 동안의 햇볕으로도 쉬이 마르지 않더니, 물이 빠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이끼가 뒤덮었다. 가을 농사를 위해 두둑 고르기를 끝내고 시비까지 해 두었는데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날마다 작업동을 정리하고, 다시 밭을 고른다.
장마가 끝나니 여기저기 우북우북 잡초가 자란다. 마늘과 양파를 캐내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잡초의 기세가 어찌나 드센지 텃밭 한켠의 호박 왕국을 넘본다. 두엄더미 옆 애호박은 너무 잎이 무성해서 열라는 호박은 안 열린다. 그나마 피었던 꽃도 감자만 하던 호박도 장마통에 떨어지고 말았다. 애호박 건너편에 심은 단호박이 장마철 반찬이었다.
봄에 단호박 모종 2포기를 심었다. 두툼한 떡잎이 그대로 달려 있고 아기 손바닥보다 작은 본잎이 겨우 돋아나 있었다. 줄기라야 10센티나 될까 말까. 날마다 아니 시간마다 자라는 게 틀림없다. 몇 달만에 사방으로 뻗어나서 텃밭을 반이나 덮었다. 
심심하지 않아도 오다가다 호박잎을 들춰보면 작은 감자처럼 순하게 앉아 있었다. 며칠만 지나도 어느새 부쩍 굵어지고 단단해졌다. 먹기 좋게 자란 단호박을 툭 따다가 씨가 자리잡기 시작한 속을 파내고 찌개를 끓이기도 하고, 조림으로 먹었다. 달큰하면서도 파근파근한 식감으로 속을 편하게 했다. 미처 다 따내지 못한 단호박이 호박잎 뒤에서 의젓하게 커갔다.
단호박 몇 개가 밭에서 커가면 괜히 든든하다. 단호박 하나 따서 무심히 바구니에 둬도 걱정이 없다. 
호박넝쿨은 날마다 전성기라는 듯 울타리를 건너고, 지붕도 올라타고, 나무 위까지 안 가는데가 없다. 그렇게 호박이 어디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손 때문이라고 한다.
호박에도 손이 있다고? 있다. 호박손. 가느다란 넝굴손이 그 무엇이든 휘감아 호박넝쿨이 이리저리 뻗어 나가게 한다. 어디든 휘어 감아 지지대 역할을 하며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단호박은 그 긴 장마를 너끈히 보내고 오늘도 호박손을 내고 넝쿨을 뻗어 나가고 몸을 키우고 그 안에 씨앗을 단단히 품고 있다. 며칠 내로 호박왕국을 넘보는 풀을 베야겠다. 나도, 아니 우리도 호박손 같은 손을 뻗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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