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누정(3)/ 순창읍③ㆍ구림면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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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누정(3)/ 순창읍③ㆍ구림면 누정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8.2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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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누정을 찾아서 (3)
만록정, 북루, 육일정, 취홍정, 쾌재정, 하방정, 호고재, 화방재, 화홍정, 효우당, 윤화정(구림)

세종 때 집현전 책임자로 한글 창제에 공이 지대했던 정인지(鄭麟趾)는 “누정을 통해 나라 다스림의 잘잘못은 물론, 한 고을의 창성과 쇠퇴의 연유를 알 수 있다”라고 했다. 이는 누정의 흥성 여부에 따라 나라와 지역의 발전을 점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누정 건립은 치적의 공적으로 평가되어 부사나 군수 등 현관(縣官)과 선비들이 건립을 추진하고, 직접 누정을 유람하며 누정을 남기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했다. 순창군도 예외가 아니었고, 여러 관 누정이 건립됐다. 

 

만록정

만록정(萬錄亭)은 조선 전기에 관(官)에서 지은 관 누정이다. 순창 객사 후원, 북루(北樓) 옆에 있었다. 만록(萬綠)은 '온갖 초목이 무성함'을 이르는 말이지만 또 다른 의미로 ‘고을의 번성함’을 담고 있는 독특한 누정명이다. 1530년(중종 25)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제39권 ‘전라도 순창군 누정편’에 기록돼 있어 조선 전기 이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북루

북루(北樓)는 읍성 객사 후원, 즉 서대청과 동대청 뒤에 세워져 객사를 감싸고 있었다. 현재의 순창초등학교 운동장 뒤쪽이다. 고려말 정몽주(鄭夢周)ㆍ정도전(鄭道傳) 등의 스승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쓴 기문(記文)이 《전라도읍지》 등에 남아 있어 고려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기(記)에 “순창자사(淳昌刺史) 남후(南侯)가 정치를 잘해 객관 뒤에 새로 누(樓)를 이었다. 순창에는 옛날부터 군의 객관이 있어 여기에서 손님을 대접해 온 것이 몇 백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데, 이제 이 누가 생겼다. 남후는 자기보다 앞 세대의 것을 이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홀로 단안을 내려 몇 백년 동안 없었던 명승을 이룩하게 되었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으니 우뚝 솟은 것이 한 고을의 장관”이라고 전하고 있다.


육일정

누정 중에는 활쏘기 수련장, 즉 사장(射場)의 구실을 한 곳이 많았다. 전국 곳곳에서 활쏘기를 연습하던 누정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누정이 사장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계리 양지천 주변 사정마을에 1903년(고종 40) 감찰사 이정규가 사정(射亭)을 짓고 육일정(六一亭)이라 이름했다. ‘육일’(六一)은 육예, 즉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 중 사(射)를 뜻하는 말이다. 이곳은 순창의 한량(閑良ㆍ무과에 급제하지 못한 무반)이 심신을 단련했던 곳이다. 
임차주 국회의원(제3, 4, 6대)이 1956년에 네 칸 건물을 사들여 명맥을 잇고, 1959년 전국궁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마을이 확장되면서 1974년 폐정되었다가 1981년에 김덕연 등 지역 유지들이 육일정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현재의 순창중학교 옆에 중건하고 1996년 순창읍 담순로 1414-23(남계리 104) 일대에 다시 지어 궁도 연마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1996년 순창읍 담순로 1414-23(남계리 104) 일대에 다시 지어 궁도 연마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육일정 전경.

취홍정

취홍정(翠紅亭)은 《전라도읍지》 11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권 등에 “순창읍성 내 관정루(觀政樓) 남쪽에 있는데, 연못과 대밭이 있다”라고 전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지금의 순창등기소 건너편으로 추정된다. 경천을 내려다보며 지은 취흥정은 관료와 선비들이 자주 찾아 정치와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쾌재정 

쾌재정(快裁亭)은 신제(申濟)가 조선 중기 순창읍 강변에 지어 유유자적했던 정자였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쾌재(快裁)’는 ‘기쁘다’, ‘즐겁다’는 뜻이다. 신제는 조선 중기의 인물로 보인다. 
‘신제’에 관한 기록으로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작가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ㆍ1559~1623)이 쓴 《유두류산록》 29일 기사에 “수레를 준비하도록 해 서둘러 떠났는데, 순지는 술이 덜 깨 부축해 수레에 태웠다. 재간당 주인 김화와 순창에 사는 내 집안 생질 신상연(申尙淵)과 천한 몸에서 난 인척 생질 신제(申濟)도 나를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요천(蓼川)을 거슬러 올라 반암(磻巖)을 지났다. 온갖 꽃이 만발하는 철인 데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 개이니, 꽃을 찾는 흥취가 손에 잡힐 듯했다. 정오 무렵 운봉(雲峯) 황산(荒山)의 비전(碑殿)에서 쉬었다”라고 적고 있다. 


하방정

하방정(荷芳亭)은 군청 앞 응향지 주변, 응향각 위에 있던 정자였다. 연꽃 향기가 그윽한 정자라는 의미라 추정된다.


호고재
 
‘독신호고(篤信好古ㆍ도를 독실히 믿고 옛것을 좋아하다)'라는 의미가 함축된 호고재(好古齋)는 김인덕(金仁德)이 학문을 연구하며 지내다 후에 기증해 지역 사림(士林)의 강학소로 사용했다. 해방 후에는 유림이 단군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사용했다. 
지금의 순창등기소 건너편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노민(1929년생ㆍ순창읍 창림동 거주) 옹의 회고에 의하면 순화아문(2층 수옥루)의 오른쪽, 즉 현재 군청 통합기준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 때 강천산 입구로 옮긴 이후 폐허 상태로 있다가 소멸됐다. 

▲호고재(강천산 입구로 옮긴 후의 모습) 

화방재
 
화방재(畵舫齋)는 순창읍 관아에 달린 건물로 응향각과 인접한 거리에 있었다. 중국 송(宋)나라 때 '구양수체'라는 서체를 창안한 구양수(歐陽脩)가 활주(滑州)에 좌천되어 갔을 때 서재 이름을 화방재라 하고 “내 화방재에 와서 휴식하는 자는 배 가운데서 휴식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했다. 순창 화방재도 지은 목적이나 위치로 보아 이를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고관이나 선비들이 화방재의 의미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여암 신경준의 《여암유고》 권4에 기록된 <화방재기>에서 “1769년에 세운 화방재는 당시 순창의 명승으로 알려진 응향각 주변에 자리했다. 응향각은 주위에 대숲과 나무들이 둘러싸 그윽한 맛이 있었으나 넓게 트인 경치를 볼 수 없어 응향각 서쪽 남지(南池)와 시내 사이 긴 언덕에 새로 누각을 세워 화방재라 했다”고 전하고 있다.
곡운(谷耘) 권복(權馥)의 《곡운공기행록》<남유록(南遊錄)> ‘유상편’에 “순창 동헌 아래에는 호수가 있어서 연꽃이 많이 피어 있다. 호수 기슭에는 누선이 정박한 모습의 집, 화방재가 있는데, 우뚝하게 이름난 정자이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 중기 사림(士林)의 영수 김종직(金宗直)도 전라도관찰사를 지낼 때 순창에 들러 남긴 시에서 “순거문고와 노래 파하고 턱 고이고 조노니 / 구양수의 서실 화방재와 아주 비슷하구려(琴歌旣罷支頤睡 絶似歐公畫舫齋)”라고 했다. 

▲조선시대 여러 누정이 있던 군청 주변 경천의 1930년대 모습 / 종걸 스님 제공.

화홍정

화홍정(華紅亭)은 관정루 남쪽에 있던 순창 관아에 소속된 관누정이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고 《전라도읍지》 11권에 전하고 있다. 

 

효우당

효우당(孝友堂)은 순창읍 가잠마을에 있었다. 정자명에서 나타나 있듯 권윤덕(權允德)과 상덕(商德)ㆍ숭덕(崇德)ㆍ준덕(俊德)ㆍ민덕(敏德)ㆍ종덕(種德) 여섯 형제가 효우(孝友)의 도를 다하며 초당을 지어 함께 거처했다. 이들 나이가 연로해 효우당은 노우당(老友堂)이라고도 불렸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고경명(高敬命)이 1586년 순창군수로 재임 중에 이들 형제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가상히 여겨 칭송하고 ‘효우당’이라 이름 지어 당호를 걸어 주었다. 소를 잡아 잔치도 베풀었으며, 시 8수를 지어 주었다. 1766년(영조42) 이후 편찬된 《전라도 순창군읍지》에 “在南山後里權九德六兄弟所構毁于丁酉亂(재남산후리권구덕육형제소구훼우정유란)”이라고 적고 있다.
다음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한문학 4대가(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순창으로 부임하는 몽촌(夢村) 임타(林㙐)를 전송하며 읊은 시 <송림실지부관순창(送林實之赴官淳昌)>의 한 대목이다. 
왕년에 호남 땅 두루 돌아다녔나니 
昔年行役遍湖中(석년행역편호중)
어딜 가나 대나무 숲 맑은 시냇물 
脩竹淸川處處同(수죽청천처처동)
그중에도 명승으론 적성(순창)이 최고 
最是名區赤城勝(최시명구적성승)
더군다나 송사(訟事) 없는 순박한 풍속이라네 
況聞淳俗訟庭空(황문순속송정공)

구림면 윤화정

윤화정(倫和亭)은 구림면 유지들이 인화계를 결성하면서 1975년 운남리 연산마을에 세운 누정이다. 누정 이름 윤화정은 “인륜(人倫)에 맞게 화목하게 지낸다(道造居倫和)”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륜(人倫)에 맞게 화목하게 지낸다(道造居倫和)”는 뜻을 가진 구림면 운남리 연산마을의 윤화정(倫和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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