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34)/ 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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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분다(34)/ 기약
  • 선산곡
  • 승인 2020.09.0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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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약(期約) 

거의 오십년 전의 일이 되살아나는군요. 돌이켜보면 그때도 참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잊혀 지지 않는 추억들을 쌓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선 병장님도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손재주 좋고 바지런하고, 기타도 가끔 치면서 철없던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셨지요.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퇴직한 뒤 강원도 화천 산골에 자리를 잡았는데 텃밭에 복숭아나무 몇 그루도 심었습니다. 봄에 복숭아꽃이 피면 원주(原州)의 우리 내무반에 걸려 있던 자그마한 액자의 시를 생각하고는 합니다.

복사꽃 피면은 가슴 아프다 
속생각 너무나 가슴에 차서

주요한의 시라고 그랬던 가요. 어쨌든 그림과 글씨는 선 병장님의 작품이었지요. 복사꽃이 막 피어나던 시절에 갓 전입한 신임졸병에게 그 그림과 시는 칙칙한 군대생활을 이겨내는 데에 큰 힘을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복사꽃을 참 좋아하게 되었지요.

그해 추운 겨울에 찾아 오셨지요. 청춘을 바친 군 생활을 접고 저마다의 자리에 돌아가면, 저절로 잊힐 옛 동기를 찾을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찾아오신 당신의 손에 김수영의 시집이 들려 있었습니다. 시인의 품성을 지녔던 사람이 건네준 책을 받아야하는 내 메마른 손은 시(詩)와는 너무나 동떨어져있어 부끄럽고 민망하기만 했습니다.
술을 잘 마시지 않은 줄 알고 있으면서도 함께 들렀던 곳은 선비 같은 손님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막걸리 집이었습니다. 조금은 거친, 주변사람들과 함께 기울인 술잔이 혹여 쓰지는 않았을까 마음 조렸던 것은 그만큼 여유를 갖지 못한 내 처지 때문이었습니다. 그 먼 곳 나를 찾아 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는 생각, 두고두고 나를 부끄럽게 했던 자리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다음 날 버스 터미널에서 차표 한 장 끊어 주지 못한 배웅이 가슴 아팠습니다. 아니 슬펐다는 표현이 더 맞는 말인지 모릅니다. 이어진 편지글에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는 말은 틀립니다. 나는 그때 따뜻한 대접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주 내무반에 그런 시를 걸었다는 것은 잊고 있었습니다. 뜻밖의 일입니다만, 그러나 사실이겠지요, 그때 젊음의 심상(心傷) 한복판에 그 시가 자리하고 있었음은 기억할 수 있었으니까요. 주요한의 시가 아니라 김 억의 시입니다. ‘속생각 너무나 가슴에 차서’로 썼던가요? ‘속생각 너무나 한없으므로’가 원래 맞는 시구인데 말입니다. 1,2연의 ‘가슴’이 중복되어 마음에 걸리지만 기억이 명료하다면 ‘가슴에 차서’가 더 어울리기도 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내주신 저서를 통해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가’의 삶을 알았습니다. 장마가 길어 눅눅해진 책들 중 제일 먼저 ‘동국이상국집’을 바람 곁에 놓고, 책 씻기를 했습니다. ‘백운소설(白雲小說)’을 다시 읽으면서 그 분야 역사학자인 그 옛날의 손님을 찾아가리라 마음 다지기도 했습니다.
지도를 놓고 화천(華川)이 어딘가를 찾았습니다. 청춘의 소용돌이 한복판을 자리한 곳, 어쩌면 그리움의 갈증 때문에 늘 가보고 싶은 곳이 산 첩첩(疊疊) 강원도입니다. 그 가운데에 있는 화천이라는 곳이 그다지 먼 곳은 아니겠지요. 당장은 힘들지라도 어느 때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약을 드리겠습니다. 50년 해를 걸러 찾아갈 수 있다는 기약. 그 기약이 가슴 뭉클해지는 이유를 지금 이 순간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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