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9) 팔덕면 청계리-강천산과 무이서원의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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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9) 팔덕면 청계리-강천산과 무이서원의 고장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9.0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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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 (9)

청계리(淸溪里)는 팔덕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청계리는 강천산이 속해 있고, 순창군의 정중앙에 있다. 북쪽은 무이산을 경계로 구림면, 서쪽은 금성산성이 있는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남쪽은 용산리와 서흥리, 동쪽은 월곡리와 접하는 방대한 면적이다.

▲팔덕면 청계리 상죽마을과 하죽마을 전경.

마을 유래와 현황

마을이 대나무 숲으로 덮여 있어 통대 청계리라 불렀다. 고려시대 남원양씨가 제일 먼저 이거 해 차츰 촌락을 형성했고, 임진왜란 후에 주변 마을 사람들이 모여 큰 마을이 되었다고 전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팔덕면에 속하게 되었다. 
2020년 7월 31일 기준 인구는 114가구, 203명으로 남자 100명, 여자 103명이다. 행정구역상 청계리 안에 상죽마을, 하죽마을, 강천마을, 전원마을이 있다. 

▲강천마을 전경.
▲전원마을 전경.

강천산 음용 온천수

순창군이 체류형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해마다 1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오는 강천산 인근 청계리에 음용온천수 1공과 온천수 2공, 총 3공 온천을 개발했다. 수체험센터는 팔덕면 소재지를 지나 강천산 가는 길인 청계리 781-1번지에 한창 공사 중이고, 수체험센터 부지 도로 쪽에서 강천산 음용온천수를 공급하고 있다.
군 자료에 따르면 음용온천수는 심도 791미터 평균온도는 26도(℃), 적정 양수량은 하루 529톤이며, 수소이온농도(PH) 8.2 정도의 천연 알칼리 환원수다. 칼슘과 마그네슘 등 각종 미네랄이 고르게 함유되어 있으며, 일반 물보다 수소가 40배 넘게 들어 있어 물맛이 일품이다. 한국물학회로부터 ‘한국의 좋은 물’로 2011년과 2012년 2년 연속으로 선정돼, 전국 410개소 온천 중 음용수 부문에서 맛과 기능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좋은 물로 널리 알려지면서 군 내외에서 하루 1000여 명이 찾아와 물을 길러가고 있다.

▲수체험센터.

청계리 당산나무

청계리에 있는 느티나무 세 그루는 남원양씨가 처음 이곳으로 이사해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마을에서는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로 여겨 정월 열사흘에 번갈아 가며 제관을 뽑아 정성스럽게 당산제를 모셔 왔다. 나무 세 그루 가운데 수령 약 280년과 290년 된 두 그루가 1982년 9월 20일 보호수 제9-12-8-4호와 제9-12-8-5호로 지정되었다. 앞 당산나무(느티나무)는 아래 뜰 주민의 쉼터요, 중앙의 당산나무는 위 뜰 주민의 쉼터이자 수호신 구실을 한다. 

▲청계리 앞 당산나무.
▲청계리 중앙 당산나무와 당산제.

무이서원

서원(書院)이란 선현을 봉사(奉祀)하고 자제를 교육하던 기관이다. 1541년(중종 36) 경상북도 영주에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을 처음 설립한 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군내에 설치되었던 서원으로는 화산서원(花山書院ㆍ유등면 소재)과 지계서원(적성면 지북리), 남산서원(순창읍 가남리), 어암서원(쌍치면 둔전리), 무양서원(팔덕면 용산리) 그리고 무이서원이 있었다. 
무이서원(武夷書院)은 1788년(정조 12)에 청계리 무이산(武夷山) 아래 창건됐다. 순창설씨와 옥천조씨 문중에서 유학 진흥을 위해 1788년(정조 12) 6월 건립했다. 주벽(主壁)은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 배향 인물은 설공검(薛公儉), 설인검(薛仁儉), 조원길(趙元吉)이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다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옛 《순창군지》에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지은 무이서원의 <주부자 봉안문>(朱夫子奉安文), <삼선생봉안문>(三先生奉安文), <상량문>(上樑文)이 실려 있다. 청계 마을회관 앞에서 오른쪽 농로로 올라가면 무이산 아래 능선 자락에 있는 농토가 무이서원 터라고 한다. 서원 터에서는 기와 조각들이 발견된다. 

용대암과 강천사 전설

강천산은 호남의 소금강으로 알려져 옛날부터 여러 암자가 있었다. 암자 중에 강천사 서북방에 자리 잡은 용대암이 가장 크게 번창했다. 그런데 절이 생긴 지 꼭 100년째 되는 해부터 매달 음력 초하룻날 밤이면 어김없이 괴물이 나타나 주지승을 실신시키고 많은 승려을 괴롭혔다.
그러기를 몇 년, 그동안 시름시름 앓던 주지승이 입적하게 되었고, 새로운 주지승이 오게 되었다. 이 주지승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듣고는 이는 필시 부처님께 정성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부터 지극 정성으로 염불하며 부처님께 괴물을 물리칠 묘책을 알려 달라고 빌었다.
3일째 되던 날 밤,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괴물을 굴복시키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라고 일러 주었다. 다음 달 초하룻날 밤이 되기 전에 청룡과 황룡을 그려 절 마루 끝 양 기둥에 붙여 놓으면 괴물이 나타나되 이변이 일어날 것이니 그대로 시행하라고 했다.
드디어 초하룻날 밤이 되었다. 주지승은 동자승을 시켜 횃불을 높이 들어 사방을 밝히게 했고, 남은 승려들도 주지승 곁을 지켰다. 시간이 흐르고 초조감은 더해 갔다. 그전에 괴물이 나타났던 시간에 가까워지자 모두 불안해했고, 주지승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바람도 없는데 촛불이 꺼질 듯 말 듯하더니 싸늘한 기운이 경내를 휩싸고 휘파람 소리가 요란해지며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괴물이 나타난 것이다. 주지승은 두려움을 떨치려 정신을 가다듬고 벌떡 일어났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부릅떠 괴물을 크게 꾸짖으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괴물이 뜰아래 넙죽 엎드리는 것이었다. 괴물은 머리를 조아리고 “나는 천년 묵은 지네입니다. 이제 인간세계에서 수명을 다해 승천할 기회가 왔는데 절에서 밤낮으로 향불을 피워 대는 바람에 숨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됐으니 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밤에는 기필코 모두를 쓸어버리고 승천하려 했는데 청룡과 황룡이 이를 방해하니 이제 스님께 구원을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새 터를 잡아 절을 옮겨 주기만을 빌겠습니다” 말한 후 사라졌다. 
이윽고 먼동이 트기 시작했고, 승려들은 지난밤 사건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고, 절을 옮기기로 하고 새로운 절터를 찾기 시작했다. 새 터는 천년 묵은 지네 같은 괴물이 다시는 범하지 못하게 하려면 청룡과 황룡이 버티고 있는 곳이라야 했다. 그 새 터가 지금의 강천사다. 
강천사 자리는 선담(仙潭)이라 일컫는 위 용소가 있고, 옥녀담(玉女潭)이라 일컫는 아래 용소가 있어 어떤 사특한 세력도 깃들 수가 없는 길지였다. 지금의 강천사는 이렇게 하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기에 사천왕암과 관음암이 주변에 버티고 있어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있는 사천왕문도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순창의 구전설화》
(양상화 편저, 순창문화원 간행) 상권 172쪽 인용 

태조 왕건도 다녀간 강천사

강천사는 팔덕면 청계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다. 887년(진성 여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불교 전파를 위해 전국을 수행하러 다니던 중 팔덕면 청계리 강천산 자락에 복천사(福川寺ㆍ福泉寺, 강천사의 옛 이름)를 창건했다. 
강천사에 소속된 암자는 명적암(明寂庵)ㆍ연대암(蓮臺庵)ㆍ용대암(龍臺庵)ㆍ왕주암(王住庵)ㆍ지적암(智積庵)이 있었다. 특히 왕주암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때 먼저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후방 요충지인 금성(지금의 나주)을 점령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태조가 이 절에서 머물렀던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왕주암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1316년(충숙왕 3) 덕현선사(德賢禪師)가 오층 석탑과 12개 암자를 창건해 사세(寺勢)를 확장했으며, 조선시대 성종 13년(1482년)에 작성된 <강천사 모연문> 기록을 통해 강천사가 이 해에 신말주(申末舟)의 부인 설 씨의 시주를 받아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강천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불타 없어졌으나, 1604년(선조 37)에 소요 대사(逍遙大師)가 중창하면서 옛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선조(宣祖) 때 학자 귀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이 이곳에 유숙하며 <숙강천사>(宿剛泉寺)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는데 이때부터 강천사(剛泉寺)로 불리었다 한다. 1760년(영조 36) 경진판 《옥천군지》에 의하면 강천사는 불전이 3개소, 승방이 12개소이며, 명적암ㆍ용대암ㆍ연대암ㆍ왕주암ㆍ적지암 등 강천사에 속한 암자가 12개가 있었으며 그 당시 500여 수도승이 살던 큰 사찰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보광전, 칠성각, 첨성각의 당우가 모두 불탔다. 당시 강천사에는 비구니들이 주로 머물렀는데 그 까닭은 창건자 도선국사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이 있어야 빈찰(貧刹)이 부찰(富刹)로 되고 도량이 정화된다”라는 예언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한다. 그 후 승려 김장엽이 1959년에 새로 중창했다. 2014년 현재 강천사에는 대웅전, 관음전, 요사채 등이 있다.
강천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1316년(충숙왕 3)에 건립된 강천사 오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2호)이 있고, 강천사 모과나무(전라북도기념물 제97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300년 정도) 모과나무로 지금도 열매를 맺고 있어 가을에 강천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절 앞 내를 건너 남쪽에는 삼인대(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가 있다.

▲1910년대 강천사. 전북대학교 박물관 제공.
▲1910년대 연대암. 전북대학교 박물관 제공.
▲1954년 촬영된 삼인대. 이경모 제공

효자 박경원 정려

개항기 효자 박경원 정려(孝子朴慶元旌閭)는 청계리 하죽마을에 있다. 
박경원(朴慶元)은 문익공(文翼公) 박효신(朴孝臣)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며, 아버지를 여읜 뒤에는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했다. 어머니가 병이 드니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드려 10여 년을 더 살게 하였고, 병이 재발해 임종하려 하자 볼깃살을 베어 약과 함께 드려 5일간 명을 연장시켰다. 상을 당해서는 맨밥을 먹으며 3년간 피눈물로 지냈다. 이에 호남 유생 이승헌(李承憲) 등이 예조에 글을 올려 1905년(고종 42) 4월에 나라에서 정려를 명했다. 같은 해 정려와 비를 세웠다.
정려각은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218×187센티미터(㎝) 규모이며, 비는 110×42×15센티미터다. 현판에는 ‘효자 증호조 참판 밀양박공 경원지려(孝子贈戶曹參判密陽朴公慶元之閭)’라고 되어 있으며, 비석에는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효자 밀양박공 경원비(贈嘉善大夫戶曹參判同知義禁府事孝子密陽朴公慶元碑)’라 쓰여 있다. 정려기는 숭정대부(崇政大夫) 비서원경(秘書院卿) 박용대(朴容大)가 썼다. 

▲효자 박경원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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