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금과 남계 ‘삼절당’과 ‘경주설씨 삼절사현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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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금과 남계 ‘삼절당’과 ‘경주설씨 삼절사현유허비’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9.0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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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어르신 소개로 금과면 남계리 호치마을에 있는 ‘삼절당’(三節堂)과 ‘경주설씨 삼절사현 유허비’(慶州偰氏 三節四賢遺墟碑)를 접하게 되었다. 《순창군지》에도 실려 있지만 많은 군민이 알고 있으면 하는 마음에 소개한다.
설보신(偰普莘)이라는 위구르인(回骨ㆍ회골, 回紇ㆍ회흘, 回回人ㆍ회회인)이 있었다. 그는 나라가 망하자 원나라 수도 북경으로 이주했고, 광동전운사로 적을 토벌하다 세상을 떠났다.
증손자 설손(偰遜)은 원나라 순제 때 황태자 교육기관인 단본당정자라는 관직을 맡게 되었다. 당시 북경에 와 있던 고려 왕자(훗날 공민왕)가 황태자의 시종을 맡고 있을 때여서 둘은 매우 가깝게 지냈다. 세월이 한참 흘러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설손은 조상의 위패를 안고 아들 5명을 데리고 1358(공민왕 7)년 공민왕을 찾아 고려로 귀화했고, 경주설(偰)씨 시조가 되었다. 공민왕은 옛 친구 설손에게 부원후를 내려 경기도 과천에 살게 하고 삼절당을 세워 조상을 기리게 했다. 
설손의 맏아들 설장수는 위구르어뿐만 아니라 중국어, 몽골어에도 능통했다. 고려에 온 지 4년 만인 21세 되던 1362년에는 문과에도 급제했다. 이때쯤엔 한국어에도 정통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중국어와 몽고어에 특히 능통했던 그는 외교무대에서 큰 활약을 펼친다. 우왕 시절부터 명나라를 드나들며 명나라와 무난한 관계를 맺는데 공을 세운다. 
그즈음 조선 건국의 주역 정도전이 명나라로부터 요동정벌론의 주창자로 의심 받아 압송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성계는 설장수와 권근을 대신 보내 사정을 설명토록 명했고, 설장수는 대성공을 거두고 돌아온다. 이후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직후 명나라에 사정을 설명하고 정종의 즉위를 허락한다는 외교적 승인을 받아온 이도 설장수다. 실록을 보면 그는 총 8차례에 걸쳐 명나라를 다녀왔다.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기까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명나라와의 대외관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경주설씨(偰氏)는 위구르족의 귀화 성씨다. 설손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경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경주설씨는 영광군수를 지낸 설침(偰琛)이 관직에서 물러나 외가가 있는 순창으로 낙향해 금과면 남계리 호치마을에 입향한 이후 그 자손이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해 오고 있다. 
금과면 남계리 호치마을에 경주설씨 사당인 삼절당(三節堂)이 있다. 삼절당은 시조인 설손의 증조할아버지 설보신의 충성과 증조할머니 희태특늑의 정절, 할아버지 설문질의 효성의 삼절(三節)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이직(李稷)이 시를 지어 현판에 걸었고 권근(權近)이 서문을 짓고 현판 글씨는 장유(張維)가 썼다. 경기도 과천에 있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금과면 남계리 호치마을로 옮겼다. 
삼절당 경내에 ‘경주설씨 삼절 사현 유허비’(三節四賢遺墟碑)가 있다. 삼절은 설보신ㆍ희태특늑ㆍ설문질이고, 사현(四賢)은 설손ㆍ설장수ㆍ설경수(설장수의 동생)ㆍ설순(설경수의 아들)이다. 유허비는 구한말 호남의 대학자인 송사 기우만에게 글을 부탁해 1913년에 세웠다.
삼절당과 유허비는 경주설씨의 원류를 말해 주는 유적이자 여말선초 역사를 담은 소중한 문화재다. 더불어 귀화인이 우리 역사에 어떻게 기여해 왔는지, 왜 그들이 우리와 더불어 살아 가야 할 대상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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