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누정(4) 금과면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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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누정(4) 금과면 누정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9.0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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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면은 군내에서 순창읍 못지않게 누정이 많았다. 매우리에 매은정ㆍ미암정ㆍ백정ㆍ삼외당ㆍ삼지당ㆍ청취정ㆍ환취당이 있었고, 고례리에 세매헌ㆍ하유재 등이 있었다. 남계리에 사성재ㆍ영호정ㆍ호계정이, 동전리에는 설진영서실 외에도 구심당ㆍ매국헌ㆍ모은정ㆍ양심정이 있었으며, 아미산 자락에 미헌재ㆍ송석대, 그 외 백인정 등이 있었다. 

매은정(梅隱亭)
 
이기(李琪)가 매우리에 소요처로 지어 지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1957년에 발간한 《순창군지》에 전하고 있다.

백인정(百忍亭) 
 
김봉식(金鳳植)이 담락(湛樂ㆍ평화롭고 화락하게 즐김)하던 곳이었다. 정자명으로 백인(百忍)이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화목이었다. 백번을 참아야 화목을 이룬다는 의미다. 어원은 당나라 때 사람인 장공예(張公藝)였다. 그의 집안은 9대가 한집에서 살았는데, 당나라 고종(高宗)이 그 연유를 물으니, 장공예는 인(忍) 자를 100번 써 올렸다. 그 뜻은 백 번 참는 것이 한집에서 대가족이 다투지 않고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백정(栢亭)
 
조선 전기의 문인이었던 설위(薛緯)가 매우리에 지어 소요처로 지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1935년에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 전하고 있다.
설위는 본관은 순창, 자는 중민(仲敏), 호는 백정(栢亭)이다. 1419년(세종 1)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1위로 급제했고, 만경현령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현령 재직 때 청렴하고 근신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관찰사의 비방을 받아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그때 지은 시가 정약용의 《목민심서》ㆍ《패관잡기》ㆍ《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 만경현 명환편’에 전한다. 
 
몇 해 동안 강가 고을에서 홀로 거문고를 울리며 
數年江郡獨鳴琴(수년강군독명금)
뜻을 높은 산과 깊은 물에 두었네 
志在高山與水深(지재고산여수심)
세상에서 종자기(鍾子期)의 귀를 만나기가 어려우니 
世上難逢鍾子耳(세상난봉종자이)
거문고 줄 가운데에 누가 백아(伯牙)의 마음을 알랴 
絃中誰會伯牙心(현중수회백아심)

삼외당(三畏堂)

매우마을 서쪽 입구 언덕 바위 위에 있다. 이 마을 출신 홍함(洪函ㆍ1543~1593)이 젊었을 때 지었다. 홍함은 자는 양원(養源), 호는 삼외당(三畏堂)이다. 선조 때 봉정대부로 사헌부 감찰, 문경현감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 막하에 들어가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관직에서 물러나 임진왜란에 출전하기 전에 누정을 지어 자신의 호를 붙여 삼외당이라 이름 붙였다. 현 건물은 철종7년(1856년) 남양홍씨 후손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정자 주변에는 수백 년을 지켜온 아름드리 고목들이 멋진 풍광을 유지하고 있어 휴식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누정 현판에 홍함과 교류한 호방했던 백호(白湖) 임제(林悌),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충강공 김제민(金齊閔), 담양에서 의병에 참가해 공을 세운 충장공 양대복(梁大福) 세 사람의 시가 걸려 있다. 

▲매우마을 서쪽 입구 언덕 바위 위에 있는 삼외당 전경.

삼지당(三知堂)

설순조(薛順祖ㆍ1427~1496)가 벼슬에서 잠시 물러나 있을 때 매우리 뒷동산에 세웠던 누정이다. 설순조는 자(字)는 창윤(昌胤), 호(號)는 삼지당(三知堂)이다. 단종 2년 무과에 급제해 부사직이 되었다.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세조 원년(1455)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호(自號)를 삼지거사(三知居士)라 하고 삼지당(三知堂)을 지었다. 
설순조는 단종이 영월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5일간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이때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에 살던 귀래정 신말주도 삼지당에 자주 들러 교류하며 시를 주고받았다. 설순조는 27년만인 1483년에 성종의 간곡한 부름에 부산포 첨절제사에 임명됐다. 이후 상주목사ㆍ성주목사ㆍ김해부사ㆍ황주목사 등을 지냈다. 

설진영서실(薛鎭永書室)
  
금과면 동전리 25에 자리하고 있다. 남파(南派) 설진영(薛鎭永ㆍ1869∼1940)이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사상을 고취했던 곳으로 1910년에 세웠다. 1998년 1월 9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되었다.
서실은 앞면 4칸ㆍ옆면 3칸으로 앞ㆍ뒷면 모두 툇마루가 있는 집이다. 왼쪽부터 방과 방, 그리고 대청으로 이어지며 방과 대청 사이는 분합문이 있어 오른쪽 3칸은 필요할 때 모두 터서 한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많은 사람을 동시에 모아 놓고 강의를 할 수 있는 서실에 적합한 구조로 꾸민 것으로 대청 전면에는 4짝들이 얼개문을 달아 여름에는 터서 사용했다. 처음에는 초가였으나 현재는 시멘트 기와로 초가였던 지붕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설진영의 본관은 순창이고,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派)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해 스승 기우만(奇宇萬)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투신해 활동했고,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서실을 세우고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0년 5월 19일 새벽, 일제의 창씨개명(創氏改名)에 항거해 절명시(絶命詩)와 유서를 남기고 마을 건너편 논 가운데 있는 우물로 가서 몸을 던지며 명예를 지켰다. 

▲설진영서실. 남파(南派) 설진영(薛鎭永)이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사상을 고취했던 곳으로 1910년에 세웠다.

세매헌(世梅軒)

설만동(薛萬東)이 고례리에 지어 지냈던 누정이다. 설만동은 고례리 출신으로 1687(숙종 13)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흉년에 재물을 풀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매화나무를 심고 가꾸는데 취미를 삼아 세매헌이라 자호를 하니 항상 빈객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다. 누정명 세매헌은 대대로 매화를 심는다는 의미다. 이조판서를 지낸 스승인 갈암 이현일이 현판기를 썼다.

송석대(松石臺)

아미산 서쪽 옛 수앵리(垂鶯里) 백호등 상단에 있던 누정으로 설광린(薛匡麟ㆍ1744~1852)의 소요처였다. 《조선환여승람》에 전하고 있다. 설광린의 자는 중서(重瑞), 본관은 순창으로 금과면 내동리(內東里) 출신이다. 

양심정(養心亭)
 
순창설씨 문중에서 좌승지 설상기(薛相基)를 기리기 위해 동전리 동전마을에 1991년에 지었다. 정자 주인 설상기는 남파 설진영의 아버지다. 정자는 마을 입구 산자락에 육모정으로 중건했다. 안에는 6개의 현판이 있다.

▲양심정.

청취정(淸翠亭)

설홍윤(薛弘允ㆍ1515~1583)의 소요처로 매우리 뒷동산에 있었다. 그가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처사적 삶을 살며 후진들의 교육에 전념했던 곳이다. 16세기 중엽 이후 어느 때인가 훼철되어 오늘날 존재하지 않고 설태수(薛泰收)가 지은 시문이 1935년에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 전하고 있다.
설홍윤은 자는 공신(公信), 호는 청취정(淸翠亭)이다. 1537년(중종32년)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하서 김인후 등 여러 선비와 더불어 경전을 논하면서 학문에 정진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은 그를 극찬했다. 율곡 이이는 ‘고상한 선비’라 했고, 하서 김인후는 ‘학문의 집대성’이라 말했으며 이곳을 다녀가며 시를 남기기도 했다. 

하유재(何有齋)

설세붕(薛世鵬)이 조선 후기 영조 때 고례리에 지어 지냈던 누정이다. 설세붕은 품성이 고결하고 형제 간 우애가 돈독했으며 과거(科擧)에 뜻을 끊고 부귀공명을 물거품으로 생각해 학문과 후진 양성에만 힘썼다. 거문고를 품고 소요자적하니 세상이 공경하여 우러러보았다 한다.

호계정(虎溪亭)
 
유동유(柳東游ㆍ1615~?)가 남계리 140에 지은 누정이다. 유동유의 고조할아버지는 강천산 삼인대에서 중종의 폐비 신씨 복위를 청한 무안현감 석헌(石軒) 유옥(柳沃)이다. 
누정은 1640년(인조 18) 창건했으며, 1929년 중건했다.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중앙에 방을 두었다. 누정 내에는 유동유의 형제인 어목당 유동순과 남간 유동연, 순창군수를 지낸 폄재 최온의 시가 현판으로 남아 있다. 

▲호계정. 어목당 유동순과 남간 유동연, 순창군수를 지낸 폄재 최온의 시가 현판으로 남아 있다. 

환취당(環翠堂)

설당(薛塘)이 매우리 뒷동산에 세웠던 누정이다. 설당은 명종 때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에 은거하며 초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만 일생을 바쳤다.  

회계당(晦溪堂)

박인섭(朴寅燮ㆍ1873~1934)이 독서하던 곳으로, 서암산 청룡마을 아래에 있었다. 박인섭은 송병선(宋秉璿)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삼키고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을미사변 이후에 강천산 삼인대에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삼인대 유감>(三印臺有感)이라는 시에서 을미사변 이후 시국에 대한 우국충정을 엿볼 수 있다. 

옛 생각하노니, 아직 왕비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憶昔璇宮未正年(억석선궁미정년)
세 신하는 당당히 상소를 올렸었네
堂堂三哲啓章先(당당삼철계장선)
밝은 세상에 을미년의 변을 당했으니 
摠明當此靑羊變(총명당차청양변)
다투어 오랑캐와 하늘을 같이 하네 
爭與裸夷共彼天(쟁여나이공피천)

기타 누정

이외에도 남계리에는 유운경이 구한말에 지은 사성재(思聖齋), 유동연 등이 지은 영호정이 있었다. 동전리에는 300여 년 전인 17세기 중반에 지었다는 설응기의 구심당(求心堂)과 설응기의 매국헌(梅菊軒), 그리고 설응형이 지은 모은정이 있었다. 아미산 자락에는 설봉순이 순조 때 지은 미헌재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순창군지》, 《옥천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조선환여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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