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 남광당 한약국 변창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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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남광당 한약국 변창일 대표
  • 김민성 기자
  • 승인 2010.07.28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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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초졸 이력, 이제는 대학졸업
포기하지 않는다면 꿈은 이루어진다

동계 남광당 한약국 변창일 대표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을 하게 된다. 막상 이루고 나면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닌데도 꼭 하고 싶어 한다. 나이 마흔다섯에 검정고시 준비에 들어가 고진감래 끝에 중․고를 거쳐 대학을 졸업한 남광당 한약국 변창일(동계 현포리) 대표는 배움에 관한 그 어느 누구보다 설움을 많이 겪었다. 포기하지 않고 초등학교 졸업 30년이 훨씬 넘은 나이에 대학이라는 최종학력을 거머쥔 변 대표를 통해 배움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보자. -편집자 주-

 

- 배움이 부족한 것에 대해 얼마나 설움이 크셨는지요.

 

▲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상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공부도 곧잘 해서 괜찮은 성적으로 시험에는 합격했는데 면접때 논 두마지기가 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수업료를 제대로 낼 수 없을 것이라는 면접관의 판단이 저보다 점수가 낮은 학생을 선발시켰습니다. 한 열 마지기 있었다고 답했다면 좋았을걸 그랬나봅니다(웃음). 집에서 몇 개월 있다가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마음 한편에는 서울로 가면 공부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빡빡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직물공장에서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해야 했습니다. 무려 8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창피해서 어디에 이력서도 낼 수 없었습니다.

-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왔나요.

▲ 1978년에 고향인 인계 호계리로 돌아왔습니다. 이때만 해도 서울은 오일 파동으로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 와보니 서울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이 활활 불타오르면서 이곳이 내가 희망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왔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의 반대였습니다. 장남이 서울에서 돌아오자 창피하다고 난리셨습니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망아지는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살지 못하고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논 700평을 사서 어머니께 드리고 맨몸으로 시작했습니다. 닭도 조금 키우고 남의 일도 다니고 친구한테 32만원을 빌려서 소 두 마리도 구입했습니다. 그러다 1980년 전두환 정권 때 영농후계자 육성사업이 시작됐습니다. 1기로 선정돼 여러 활동을 시작 했습니다. 각종 교육도 많이 들었습니다. 4H활동도 열심이었구요. 그러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주로 어떤 농사를 지으셨나요.

▲ 이것저것 다 했습니다. 소도 키우고 약초도 심었습니다. 그리고 첨단 비닐하우스도 시작했는데 아마 이것이 순창에서는 처음일 것입니다. 멜론과 방울토마토를 심었습니다. 소득 작물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때는 농촌 농민들이 잘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녔습니다. 유기농과 유통의 중요성을 간파한 시기인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방향이 좀 달라진 것 같습니다.

- 나주대학 00학번(2000년 입학)이시지요? 많은 전공중 한약자원학교를 택한 이유가 있나요

▲ 물론이지요.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이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귀향 후에 소득 작물을 생각해 백지, 방풍, 우슬, 두충 등을 계속해서 심었습니다. 지금도 15가지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한약가공공장까지 만든 적이 있습니다. 판로가 막혀 재미는 못봤지만 이 분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골에 사시는 어르신들이 퇴행성관절염 등 만성질환자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도 많이 생각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대학졸업이라는 평생의 한을 푸셨는데요.

▲ 막상 이루고나니 대단한 것은 아니더라구요(웃음). 시작하기 전에는 학벌에 대한 자존심이 있어서 벼르고 별렀는데 결국은 사람 됨됨이가 중요한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고 싶은 것을 이루고나니 기분은 좋았습니다. 자식들한테도 떴떴했구요. 그리고 배움의 기쁨은 표현 할 수 없었습니다. 티비를 보다가 만학도들이 나오면 얼마나 뿌듯한지 모릅니다. 나주로 목포로 대학을 다니면서 하루 4~5시간씩 운전하고 와서 멜론과 방울토마토를 팔러 전주로 가야하는 고된 시간이었습니다. 거기에 농사일도 많아 주말에는 또 농사일을 해야 했습니다. 저도 고생이었지만 집사람도 고생이 참 많았습니다.

- 만학도로서 배움에 대한 갈망이 크다보니 자녀교육도 다를 것 같습니다.

▲ 자녀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자녀들에게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이 되는 것이 먼저겠지요. 그리고 꿈을 갖되 너무 높게 잡지 말라고 말합니다. 현실과 이상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뤄야지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기에 달려있다고 강조합니다.

-농촌에서 잘 사는 길이 있을까요?

▲ 글쎄요. 저는 복합영농을 추전하고 싶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풍년이 되면 여유가 있고 흉년이 되면 곯아야 했습니다. 투자도 분산이 중요하듯이 농사도 복합영농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축산과 하우스를 같이하면 축산에서 나오는 퇴비를 이용해 하우스 거름을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순환 농법은 비용도 줄일 수 있어 경제적입니다. 다변화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야 한 부분이 좋지 않아도 다른 부분에서 충당이 가능하거든요. 저는 소도 키우면서 약초와 과일도 하고 있습니다.

 

-건강 얘기도 해보시죠. 어떻게 살아야 건강할까요.

▲ 시골에서 의외로 육식이 많습니다. 일을 고되게 한다고 생각하다보니 이런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술도 줄여야 합니다. 술 역시 일이 힘들다보니 술로 이기려고 합니다. 음주패턴도 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잦은 모임도 육식과 술 섭취를 많게 하는 요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과 운동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일이 체지방을 줄이는 효과가 있지만 일은 한 부분을 무리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운동이 필요합니다. 또 하나 슬기로운 스트레스 관리도 중요합니다. 어차피 닥친 일이라면 긍정적으로 대치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평생의 꿈인 배움을 이루셨고 하고자 하는 일도 어느 정도 이룬 것 같습니다. 앞으로 꿈이 있다면.

▲ 저는 지금까지 30-40년 동안 영농일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책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첫 번째 꿈입니다. 두 번째는 해양대를 다닌 둘째아들이 한약과로 편입한다고 합니다. 아버지인 저의 영향인지 몰라도 아들한테 이 한약방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산으로 다니며 약초를 채취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토종약초를 캐서 아들이 운영하는 한약방에 공급하고 또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 섭취할 수 있다면 그것도 보람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시를 준비하는 큰 아들과 한약과 편입을 준비하는 작은 아들 뒷바라지에 대학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는 변창일 대표는 순창영농후계자 1기로 순창농협이사를 역임했으며 새농민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새농민회 총무와 순창자치대학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초등학교 학력을 극복하고 대학까지 마친 의지의 소유자다. 맨몸으로 시작해 이제는 나름 안정을 찾았다. 학벌에 대한 자존심 때문에 이력서조차 내기 힘들었다는 변 대표의 새로운 도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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