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10) 풍산면 대가리-향가와 옥출산의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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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10) 풍산면 대가리-향가와 옥출산의 고장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9.1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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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 (10)

대가리(大佳里)는 풍산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동쪽은 남원시 대강면 생암리, 서쪽은 한내리, 남쪽은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북쪽은 두승리와 접하고 있다. 
섬진강이 남쪽으로 곧게 흐르다 옥출산 산줄기와 만나는 지점에서 급격한 곡류천을 형성해  아름다운 향가(유원지)를 만들어 많은 관광객이 머물다 가는 곳이다. 

▲풍산면 대가마을 전경.

마을 유래와 현황

대가리는 500여 년 전 김해김씨(金海金氏)가 터를 잡았는데, 마을 지세가 자라 형국이라 자라뫼라 부르다 큰 땅 마을이란 뜻으로 대동리(大同里)로 개칭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백가리와 주지리, 대동리 각 일부를 병합해 만들어졌다. 대동리의 ‘대’ 자와 향가리의 ‘가’ 자를 합해 대가리라고 했다. 오산면 소재지였는데, 행정구역 개편 때 풍산면 소속으로 바뀌었다. 행정리로는 대가ㆍ향가ㆍ오산마을이 있다. 2020년 7월 7일 기준 대가리 인구는 205가구, 340명으로 남자가 164명, 여자가 176명이다. 

▲오산마을 전경.
▲향가마을과 유원지.

향가유원지

향가유원지는 섬진강이 옥출산을 휘감아 돌면서 머물러 간다. 나지막한 산과 맑은 강물이 이어져 강변에는 기암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고 한때 2킬로미터가 넘던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수많은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로 물줄기를 안고 있는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시인 묵객과 한량들이 뱃놀이를 즐기던 곳이다. 향가(香佳)라는 명칭은 섬진강 물을 ‘향기로운 물’이라고 하고, 강 옆의 옥출산을 ‘가산(佳山)’이라고도 부르는데, 각각 한 글자씩 따다가 붙인 것이다. 그동안 행가 또는 행가리라고도 불렸다.
향가를 흐르는 강물 속에는 일제강점기 순창과 남원을 연결하려고 만든 철교 교각 8개가 남아 있어 당시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일제는 순창 지역의 쌀을 수탈할 목적으로 철도 건설을 시작했으나 1945년 패망하자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때 뚫어놓은 ‘향가굴’은 마을 통행용 터널로 사용되었다. 군에서는 이 철도 교각을 이용해 자전거 길을 만들었다. 중간 지점에 특수 강화 유리로 된 ‘스카이 워크’ 구간을 만들어 밑을 바라보면 가슴 철렁한 전율을 즐길 수 있다. 향가 터널과 철교 교각을 이용해 새로 탄생한 길은 섬진강자전거길 전체 구간 가운데 경치가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구간으로 많은 자전거 동호인이 찾아오고 있다. 
향가유원지에 있는 향가오토캠핑장은 2009~2014년에 오토캠핑장 3개와 생태 연못, 자전거 쉼터 등을 조성해 2015년 7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주변에는 철분 등 미네랄이 다량 함유된 대가 약수터가 있고, 옥출산이 있어 2시간 정도 산행도 할 수 있다.

▲향가 자전거길.
▲향가 터널 입구.

섬진강 자락에 있던 누정 백수정와

순자강(鶉子江)은 전라남도 곡성군 주변 일대를 흐르는 섬진강의 옛 이름이다. 수많은 명사의 안락처인 누각과 정자가 지어졌는데, 대표적인 누정 5곳을 ‘순자강 5곡(五曲, 백수정와ㆍ합강정ㆍ무진정ㆍ호연정ㆍ청계정)’이라고 불렀다. 그 중 제1곡이 양응수가 지은 백수정와였다. 
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ㆍ1700∼1767)는 적성면 서림리에 살다가 풍산면 향가리로 이주한 뒤 42세(1742년)때 옥출산 자락 향가 백호(白湖, 흰 호수) 가에 누정 ‘백수정와(白水精窩)’를 지어 후학을 가르쳤다. 백수정와는 후에 ‘호호정(浩浩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은 100여년 간 후학을 가르치는 전당이자 서울 관원의 출입이 빈번한 유림의 집합소 역할도 했던 공간이었다.
양응수는 권필 문하에서 수학한 후 도암(陶菴) 이재(李縡)에게 배웠다. 53세에 특별 천거로 건원릉 참봉에 제수 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익위사부솔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4년(영조 30) 호남암행어사에 의해 경술과 학행으로 천거됐다. 1808년(순조 8) 사림의 건의로 적성면 지계서원(芝溪書院)에 그의 선조 양배(楊培)와 함께 향사했다. 

옥출산

옥출산(玉出山)은 순창 남쪽 끝자락 섬진강 변에 솟구쳐 풍산면 대가리와 전남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옥이 많이 생산되어 붙은 이름이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옥을 캐면서 뚫었던 굴이 있는데 이를 금굴이라 부르고 있다. 이 산에서 생산된 옥은 궁중에 진상되었고 일본과 중국으로 수출되기도 했단다. 
정상에는 전망대 옥출정이 세워져 드넓은 들녘과 섬진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동쪽으로 섬진강 너머 남원 문덕봉과 고리봉, 곡성 동악산 자락이 다가오고, 북쪽으로 유등면 들녘 너머 채계산, 서쪽으로는 순창읍 주산인 금산과 아미산ㆍ건지산ㆍ장덕산을 비롯해 회문산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옥출산은 비록 낮은 산이지만 섬진강 비경 때문인지 유난히 바위가 많은 게 특징이다. 북쪽에는 멍석 바위, 서쪽에는 문턱 바위, 대동 앞에는 자라 바위 등이 있다. 2009년에는 1.6킬로미터 숲속 산책로와 등산로(1.4킬로미터)를 조성했다. 

▲옥출산 금굴.
▲옥출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

옥출산성과 정유재란

옥출산성은 풍산면 대가리 옥출산 정상에서 서쪽 봉우리와 그 남쪽에 자리한 삼국시대 석성이다. 옥출산에서 생산되는 옥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았다는 설이 있으나, 섬진강을 따라 올라오는 적을 감시하기 좋은 위치라 전략적 측면에서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산성은 남북으로 길쭉한 장고형으로, 두 봉우리를 감싸고 있으나 테뫼식(산 정상에 쌓은 성)에 가깝다. 서벽과 북벽은 자연 암반으로 지형을 이용했고, 동벽과 남벽에는 석축 흔적이 남아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426미터로 성문은 북ㆍ남ㆍ서벽에 자리 잡고 있던 것 같다. 
성 내부는 평탄하며, 남쪽에는 평평한 대지가 조성되어 있다. 내부 곳곳에는 기와 조각 등이 산재해 있다. 현재는 산성 안 북쪽 봉우리에 팔각정이 세워지고, 정상부를 따라 체육 시설과 조경수를 심었다. 남쪽 편평한 대지에는 묘(무덤) 여러 기가 있다.
옥출산성에 대한 기록은 《조선 보물 고적 자료》, 《여지도서》(輿地圖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성곽조’, 《대동지지》(大東地志) ‘순창 성지조’(城址條) 등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각 문헌에 담긴 기록에는 축성 재료가 돌 또는 흙으로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삼국시대에 성이 축조된 이후 여러 차례 수축과 개축이 있었던 사실을 말해 준다. 
옥출산성은 구국항쟁의 현장이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전라도 지역은 피해를 보지 않았지만, 정유재란이 발생하면서 일본군은 전라도 지역을 우선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1597년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한 일본군 주력부대는 전주로 향하고, 일부 부대가 순창으로 들어오게 된다. 제4대(隊) 대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등이 이끄는 부대였다. 당시 순창군수 배경남(裵慶男)은 일본군이 비홍치(재)를 넘어 순창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족을 피신시켜 놓은 광덕산으로 도망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전투 없이 순창에 들어와 군민을 학살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일부 군사는 옥출산성에서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전했다. 산성을 지키던 병사들은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며 끝까지 싸웠지만 장렬하게 모두 전사했다. 

▲옥출산성.

옥산사

옥산사(玉山祠)는 조선시대 절사 김일손, 김치세, 김선경을 모신 사우(사당)이다. 순창군노인전문요양원 입구에서 뒤쪽으로 돌아가 농로 삼거리에서 축사를 끼고 좌회전해 언덕 넘어 100미터 거리에 있다.
1957년 군내 김해김씨 후손과 유림의 공의로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수학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ㆍ1464~1498),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한 지지당(知止堂) 김치세(金致世ㆍ1563~1606)의 절개와 의리를 기리기 위해 창건했다. 1962년 김치세의 아들 작천재(鵲川齋) 김산경(金汕慶ㆍ1591~?)을 추가로 배향했다. 

▲옥산사. 

광산김씨 칠효이열 기적비

‘광산김씨 칠효이열 기적비’(光山金氏七孝二烈紀蹟碑)는 광산김씨 효자, 효부(孝婦), 열녀를 기리는 비다. 풍산면 대가리에 1974년 건립되었다.
김시택(金始澤ㆍ1749~?) 이후 조손(祖孫) 간 2대에 걸쳐 5명의 효자인 김상신(金相信)ㆍ김상홍(金相弘)ㆍ김익환(金翊煥)ㆍ김기창(金箕昌)과 2명의 열녀(김시택 처 초계최씨, 김상신 처 능성구씨)가 나오니 나라에서 이를 기리기 위해 1833년(순조 33)에 오효 이열(五孝二烈)의 첩지를 내렸다. 이후 김시택의 현손자인 김기택과 김기삼(金箕三) 형제가 1857년(철종 8) 효자로 정려되어 1867년(고종 4)에 칠효이열(七孝二烈)로 개칭되었다. 

▲ 광산김씨 칠효이열 기적비.

승천하지 못한 용과 용소

옛날 대가리 향가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섬진강에는 용소(龍沼) 또는 용연(龍淵)이라 불리는 소가 있었다. 이 소에 용이 살았는데 때를 만나 여의주를 얻어 승천하게 되었다. 
용이 승천하는 날 아침에 비가 쏟아지고 뇌성벽력에 천지가 진동했다. 용소에서는 용이 오색찬란한 비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때마침 향가마을에 사는 처녀가 물동이를 이고 샘으로 물 길으러 가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용을 보게 되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처녀는 물동이를 떨어뜨리며 엉겁결에 "용이 오른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하늘로 오르던 용은 처녀의 커다란 외침에 놀라 힘을 잃고 소(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결국, 용은 승천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되어 용소에서 살게 되었다. 
‘승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용(이무기) 이야기’는 인간을 해코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곳에 전해오는 ‘승천하지 못한 용과 용소 이야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가뭄이 심할 때 이 용소에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정월에 용소 부근에 모래 언덕이 생기면 풍년이 들고, 모래 언덕이 생기지 않으면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오산초교 옛터 기념비

옛 오산초등학교 부지에는 순창군노인전문요양원과 순창노인복지센터가 들어서 있다.
순창군이 2006년 10월 31일 개원한 노인전문요양원은 군이 직영하다가 2017년 5월 1일부터 삼육재단이 위탁운영하고, 노인복지센터는 기독교장로회 순창읍교회가 운영하고 있다. 
오산초를 졸업한 동문들은 모교가 1999년 폐교되고 요양시설이 들어서자, 학교가 있었던 자리를 후세에 길이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고 2010년 10월 3일 제막식을 가졌다.
오산초총동문회는 1992년 5월 창립해 매년 모교 자리와 옥출산 등을 탐방하는 등 활동하고 있다. 오산초는 48회 동안 졸업생 2609명을 배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2010년 열린 오산초교 옛터 기념비 건립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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