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누정(5) 동계면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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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누정(5) 동계면 누정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9.23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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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면은 섬진강 상류가 흐르고 용궐산ㆍ무량산ㆍ노적봉ㆍ풍악산 등이 솟아 있어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거기에 봄에는 매실, 가을에는 밤과 감이 많이 생산되는 풍요로운 고장이기도 해서 여러 누정이 있었다. 구암정 등 현존하는 누정 외에도 양운거(楊雲擧)가 만수탄 가에 지었다는 육로정 등 9개의 누정과 남간정ㆍ망정ㆍ세한재ㆍ수운정ㆍ양호정ㆍ영하정ㆍ창주정 등 여러 누정이 있었다고 한다.

 

▲구미마을 앞 무량산 기슭 만수탄변에 자리하고 있는 구암정.

구암정(龜岩亭)

강바람 따라 호젓한 강변길을 걸으면 구미마을 앞 무량산(無量山) 기슭 만수탄변에 자리하고 있는 구암정을 만날 수 있다. 동계면 장군목길 1028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 중앙의 재실형으로 되어있다. 정내에는 8수의 시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1990년 7월 2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 131호로 지정되었다.
구암(龜岩) 양배(楊培ㆍ?-1500)가 세상을 떠난 후 사림(士林)에서 지계서원(芝溪書院)을 건립해 배향해 왔으나,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서원이 철거되자 이를 안타까워한 후손들이 1901년 구암정이 원래 있던 자리에 정자를 중건해 현재까지 보존해 오고 있다.
양배는 아우 양돈(楊墩)과 함께 학문과 덕망이 높아 연산군 때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무오ㆍ갑자 사화(士禍)로 어진 선비들이 화를 당한 것을 보고 응하지 않고 이곳에서 고기를 낚으며 은거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적성강 상류 만수탄에는 양배와 양돈 형제가 고기를 낚던 바위가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일러 배암(培巖) 또는 돈암(墩巖)이라 부르며, 이 둘을 합쳐서는 형제암(兄弟巖)이라고도 한다.

남간정(南澗亭)
 
남원 출신 남간 유동연이 지었던 누정이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유동연(柳東淵ㆍ1613~1681)은 정양(靜養) 오천민(吾天民), 폄재(貶齋) 최온(崔蘊) 등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교류했다. 평소 ‘무사(無私), 무욕(無慾), 무원(無怨), 무로(無怒)’를 생활신조로 삼고 선비로 사는 삶을 굳게 지켰다. 자는 정숙(精叔)이며 본관은 문화(文化)다. 고조부는 강천산 삼인대에서 폐비 신씨 복위 논의에 참가했던 석헌(石軒) 유옥(柳沃)이다. 
 
망정(忘亭) 
 
조선후기 순창 출신 유학자 양여매(楊汝梅ㆍ1601~1655)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장으로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화의 소식을 듣고 고향 구미리에 돌아왔다가 정자 이름을 ‘망(忘)’이라 하고 은거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양여매는 남원양씨(南原楊氏)로 자는 화백(和伯), 호는 화양(華陽)이다. 적성면 귀남에서 태어나 1635년(인조 13)에 진사에 올랐으며, 박학(博學)과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있었다. 1636년(인조 14) 옥천사마재(玉川司馬齋)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세한재(歲寒齋)
  
조선중기 유학자 진사 양여백(楊汝栢ㆍ1578~1651)이 무량산 아래 자락에 자리한 구미리에서 유유자적하며 학문을 강구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양여백은 자는 후지(後之), 호는 세한재(歲寒齋)다. 쌍매당 양사민(楊士敏)의 손자요, 생원 창주(滄洲) 양시성(楊時省)의 아들이고,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사위다. 
구미리에서 태어나 1603년(선조 36)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정국이 어지러움을 보고 벼슬의 뜻을 버리고 세한재를 짓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 희릉참봉에 제수 되었고, 1645년에 세자(世子) 익위사(翊衛司) 익찬(翊贊),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 태인현감(泰仁縣監)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거부하고 은거했다.

수운정(水雲亭)

나주목사를 지냈던 조희(曺禧ㆍ1490~1564)의 누정으로 일명 낙성당(樂聖堂)으로 불렸다. 순창군 동쪽 70리 거리인 강가에 있었다는데 조선 전기 이후 어느 때인가 훼철(毁撤, 헐어서 치워 버림)해 현존하지 않는다.

양호정(養浩亭) 

양홍(楊洪)이 구미리에 지었다는 누정이다. 양홍은 자는 심원(深源), 호는 양호정(養浩亭)이다. 양배(楊培)의 손자며, 양사형(楊士衡)의 아버지다. 

영하정(映霞亭)

천태산 아래에 양사형이 지었던 누정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양사형(楊士衡)은 1547년(명종 17) 동계면 구미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평(季平), 호는 영하정(暎霞亭)ㆍ어은(漁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양배(楊培), 아버지는 양홍(楊洪)이다. 1579년(선조 12) 33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1588년 식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군자감(軍資監)의 봉사(奉事)ㆍ직장(直長) 등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벼슬을 사임하고 남원으로 낙향했는데, 여름에 왜적이 침범하자 선조가 피난해 있는 의주 행재소(임금이 궁을 떠나 멀리 나들이할 때 머무르던 곳)까지 갔다. 또한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이대윤ㆍ최상중 등과 함께 군량을 모아 금산의 전쟁터로 보냈다.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변사정(邊士貞)ㆍ정염(丁焰) 등과 의병으로 활동하며 남은 왜적을 물리쳤다. 이러한 공로로 병조정랑에 오르고, 이어 춘추관 기사관, 경기도사, 남평현감, 예조정랑을 역임했다.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화산서원에 봉안되었다.

육로정(六老亭)
  
무량산 아래 섬진강마실휴양숙박단지 건너 구미마을에 큰 소(沼)가 있다. 인조, 효종 연간에 초로(楚老) 양운거(楊雲擧ㆍ1613∼1672)가 이곳에 육로정을 짓고 시주(詩酒)를 즐겼던 곳이다. 
이곳은 흐르는 물 가운데 반석(磐石)이 있어 수십 명이 앉아 놀 만한 곳이다. 초로공(楚老公) 또는 갓때참봉이라고 불린 양운거가 자연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찾던 곳이다. 그와 함께 노닐었던 여섯 사람이 있었다 해서 육로암(六老岩)으로 이름 했다. 남원 사람들인 오주(鰲洲) 최휘지(崔徽之)와 최유지(崔攸之) 형제, 남간(南澗) 유동연(柳東淵)과 유동달(柳東達) 형제, 양진당(養眞堂) 하만리(河萬里), 그리고 양운거였다. 이들을 여섯 명의 노선(老仙), 즉 육로(六老)라 불렀다. 그 중 유동연과 유동유는 그의 외숙들로 나이는 같은 또래였다. 최유지는 그의 사돈인데 아들 세기(世基)의 처부다. 이런 관계로 만년에 유동연과 최유지를 지북리로 불러들여 그 마을에서 함께 살았다.
구미리 가암산 동쪽 적성강변은 물흐름이 완만하고 잔잔해 물줄기가 잠시 머무르는 곳으로 종호(鐘湖)라는 널찍한 반석도 있다. “시객들의 흥겨운 노랫소리가 종소리처럼 메아리친다”는 뜻으로 양운거가 직접 이름을 지었다. 양운거는 이 바위 옆에도 누정을 짓고 벗들과 술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돌아가며 한 수씩 시를 읊으며 술을 마시는데, 술 주전자가 너무 작아 거듭 술을 채워야 하니 번거롭게 여겼다. 이에 양운거가 묘안을 내어 바위를 파서 술 항아리를 만들었다. 조그마한 술 주전자 대신 바위 항아리에 술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잔을 띄워 놓았다. 여기에 시객들이 둘러앉아 목이 마르면 술로 목을 축여가며 시를 수창(酬唱ㆍ시가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했다. 양운거는 바위에 ‘종호’(鐘湖)라 새기고, 정자 이름을 종호정(鐘湖亭)이라 지었다. 지금도 바위에는 절구통만한 구멍이 파여 있고, 종호라 새긴 각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들이 종호에서 읊은 <종호팔경운>(鍾湖八景韻)이 전해 오며, 또한 종호바위 건너편 바위에 ‘석문(石門)’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어 당시 선비들의 풍류와 호연지기를 짐작하게 한다.
양운거는 조선 현종 때의 인물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자연과 벗 삼아 육로대에서 풍류를 즐기며 지내며 학문을 닦았다. 나라를 위해 특별히 세운 공적은 없으나 글과 시에 재능이 뛰어났으며 성품이 고결했다. 친지 중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가산을 아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흉년이 들 때마다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에 큰 은혜를 베풀어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남간 유동연의 기록에 의하면 가동(家童)을 수십 거느린 부호로 산수를 사랑해 강의 연안을 따라 수십 리 간격으로 누정을 세웠는데, 주로 구미 만수탄에서 지북까지 9개가 있었다고 한다. 

▲양운거가 풍류를 즐긴 육로암 주변.
▲석문 안내판.

창주정(滄洲亭) 
 
양시성(楊時省)이 서호리 창주마을에 지어 유유자적한 소요처로 사용했다. 지금은 사라지고 1935년에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 전하고 있다. 
창주(滄洲)는 물가로 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지칭한다. 이백(李白)의 시에 “공을 이루면 옷 떨치고 떠나가서, 창주 물가 찾아 소요하리라(功成拂衣去 搖曳滄洲旁ㆍ공성불의거 요예창주방)” 했고, 두보(杜甫)의 시에는 “벼슬에 얽매인 몸 창주는 요원한 꿈이라서, 옷 떨치지 못하는 걸 그저 슬퍼할 따름일세(吏情更覺滄洲遠 老大徒傷未拂衣ㆍ리정갱각창주원 노대도상미불의)”라고 했듯이 신선이 살고 있다는 선경(仙境)의 의미로 쓰였다..
양시성(楊時省ㆍ1556∼1595)은 조선전기의 유학자다. 남원양씨로 자는 면부(勉夫)요, 호는 창주(滄洲)다. 쌍매당 양사민(楊士敏)의 7남중 장남으로 동계면 구미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우가 돈독하고 언행에 하자가 없었다 한다. 1591년(선조 24) 생원시에 합격하고 받은 백패가 구미마을 남원양씨 종중에 전해 온다.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입교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문과(文科)에 응시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명리에 뜻을 끊고 고향에 조그만 정자를 짓고 고기를 낚으며 세상을 잊으니 세상에서 그를 창주처사(滄洲處士)라 불렀다. 

청류당(淸流堂) 

주월리 어귀 오수천 강가에 있다. 주월리는 장수황씨(長水黃氏)가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데, 이곳에 사는 장수황씨 집안사람들이 선조를 기려 1957년 청류당을 세웠다.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청류당’이라는 현판과 1957년 7월 황의순(黃義淳)과 죽계(竹溪) 황안훈(黃安壎)이 지은 <청류당기>가 걸려 있다. 

▲청류당.

학암정(鶴岩亭) 
 
유산리 유산저수지 앞 남쪽 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순창 지역 나주 임씨 입향조 군자감판사(軍資監判事) 임한(林漢)의 후손들이 1901년(고종 38)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누정이다. 옥천(玉泉) 조민식(趙敏植)이 지은 <학암정기>(鶴岩亭記)와 계봉(溪峰) 장영식(張令植)이 지은 시가 걸려 있다.

▲학암정.

참고문헌 : 《순창군지》, 《옥천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조선환여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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