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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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분다(35)/ 오후
  • 선산곡
  • 승인 2020.10.0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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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먹고 남은 찐 감자가 입에 당기지 않아 수프를 끓이기로 했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둘러 녹기를 기다린 뒤 밀가루를 넣어 볶는다. 밀가루가 투명해지자 갈아놓은 감자를 넣고 천천히 젓는다. 마지막 과정인 우유를 붓자마자 전화벨이 울린다. 이런 상황에 걸려오는 전화는 정말 반갑지 않다. 나무주걱을 놓고 급히 뛰어가 전화기를 집어 든다. 번호저장이 안 된 일반전화. 모르는 전화번호지만 아는 이웃일 지도 모른다. 
“고객님이시죠?”
또 속았다. 빈번히 당하는 카드사의 상품선전이다. 지역번호를 앞에 놓고 전화를 받게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약삭빠른 꼼수다. 그 꼼수에 여성이 동원되는 것은 그들 스스로 성차별이라고 하지 않는 것 때문인 것도 같다. 여태껏 그렇게 걸어온 전화 중에 남자의 목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매번 방심했거나 무심히 대응했다가 그들의 빠른 화술에 끌려들어가는 수난(?)을 당하기 일쑤였다. 예의를 갖추자니 짜증이 나고 막 대하자니 마음에 걸린다. 대꾸 없이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리면 상대방은 그냥 웃어넘기지 않을 것이다. 빈총도 안 맞느니만 못하다는데, 이에 대응하여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전화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이 아직 내겐 없다. 운전 중이라거나 회의 중이라거나 핑계를 대거나 더러는 가만히 들어줘야만 했다. 그러나 오늘만은 예외다. 
“잠깐, 잠깐! 나 지금 끓는 죽 젓다 왔습니다!”
“아! 네네.”
무어라고 황급히 대꾸하는 것 같다. 내가 먼저 뚝 전화를 끊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장난도 아닌 실제 상황으로 마무리 했는데 상대는 믿어줄까. 아마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핑계가 없으니 죽이 끓는다고? 속으로 욕을 퍼부을지도 모른다. 이럴 때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그 관계가 모호해진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욕하지 마라. 투덜거리며 전화기를 놓았다. 그러고 보니 유행가 가사에도 ‘욕하지 말라’는 게 있다. 유행가 <맨발의 청춘>이었던가. 전혀 다른 기분이지만 ‘욕하지 말라’는 유행가가락을 흥얼거리며 죽을 젓는다. 
 해가 기울어 산책을 나선다. 저녁 무렵이면 마을 뒤 다리까지만 걷는 길이 그다지 멀지 않아 좋다. 쑥대와 갈대, 칡넝쿨까지 어우러진 길섶에 달맞이꽃이 피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스팔트 길 쪽으로 뻗은 칡넝쿨을 걷어 밖으로 돌려주는데 문득 눈에 뜨이는 잎 무더기가 있다. 혹시나 해서 뒤집어 본 잎사귀 뒷면이 쑥처럼 하얗지 않다. 잎사귀 한 장 비벼서 냄새를 맡아보니 국화(菊花)다. 구절초나 쑥부쟁이가 아닌, 야생국화를 발견한 것이 뜻밖이었다. 이 잡초더미에서 그 동안 어떤 색의 꽃을 피워냈을까, 아무튼 국화가 틀림없었다. 
여름철 모기나 벌레에 쏘였을 때 국화잎사귀를 따서 문지르면 가려움이 금방 가신다. 웬만한 약에 비할 바 없이 해독의 효과가 빠르다. 초등학교 때 만화, 격언, 생활상식 등이 인쇄된 일기장을 둘 째 형이 사다 주셨다. 거기에 적힌 국화잎사귀의 효능을 평생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은 그 해독의 효과가 신기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꽤 많은 국화 줄기들이 보인다. 한 무더기를 통째 잡아당겨보니 부엽토 위에 간신히 얹혀 있었는지 뿌리가 그대로 들려온다. 그렇지 않아도 올 가을 국화분재 하나 사리라 마음먹은 터였다. 몇 해 전까지 난간아래에 꽃을 피우던 국화들이 잔디와의 상생에 지쳐 사라진 뒤였다. 뒤뜰에 여러 포기로 나누어 심은 뒤 툭하면 벌레에 잘 쏘이는 아내에게 한 말이 생색은 아니었다. 
“든든허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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