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누정(6) 복흥ㆍ쌍치면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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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누정(6) 복흥ㆍ쌍치면 누정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0.1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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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덕정.

● 복흥면 누정

낙덕정(樂德亭)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를 기리는 누정이다. 순창읍에서 복흥면 소재지 방면으로 가다가 낙덕 저수지 못 미쳐 외송마을로 진입하는 다리 상송교가 있다. 이 다리 건너편 낙덕암 위쪽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김인후가 훈몽제에서 후학을 육성하면서 메기 바윗가에 큰 물길이 흘러 절경을 이루는 이곳에 자주 들렀던 발자취를 좇아 후손인 김노수(金魯洙)가 1900년(고종 37) 낙덕암 위쪽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순창은 김인후의 처가로 훈몽제 등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곳도 그중 한 곳이다. 김인후는 전남 장성이 고향이나, 을묘ㆍ을사사화와 인종의 치독승하(致毒昇遐ㆍ독약 든 음식을 먹고 승하)를 개탄하고 관직을 사임해 처가 마을인 쌍치면과 복흥면에서 은거하며 자연을 벗 삼아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낙덕정이 있는 곳은 원래 낙덕암(樂德岩)이라고 불렀으며 1766년(영조42) 이후 편찬된 《옥천군읍지》(순창군읍지)에 따르면 在卜興河西金麟厚講習遨遊之地(재복흥하서김린후강습오유지지)"라고 적고 있듯이, 김인후가 후학들과 학문을 가르치고 유유자적했던 곳이다. 그는 “훗날 이곳에서 훌륭한 인재가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하며,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소년 시절에 공부하던 곳이기도 하다. 
낙덕정에 오르면 솔향 그윽하고 조망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누정 앞으로 추령천 맑은 물이 흐르고 솔잎이 융단처럼 깔려, 걷는 걸음마다 푹신해 몸과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한다. 낙덕정은 일반 누정과 달리 흔하지 않은 팔모단층의 팔모지붕이며 건물 내부에 방 1칸을 만들었다. 기둥은 화강암을 약 80센티미터 높이로 깎아 받치고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올린 둥근 두리기둥이다. 
며느리서까래를 달아 처마를 길게 뺐으며, 8개 기둥마다 추녀에 팔괘를 새긴 것도 일반적인 누정 형태와 차별화된다.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지정 문화재자료 제 72호로 지정되었다. 

낙영재(樂英齋)
복흥면 김정수(金正洙)의 강학소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삼석정(三石亭)
복흥면 봉처리 화양마을 일대 신선산에 행주기씨(幸州奇氏) 기기진(奇麒鎭ㆍ1830~1903)이 짓고 지냈던 정자였다. 기기진은 자는 원서(元瑞)요 호는 삼석(三石)이다. 1844년에 15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필법(筆法)으로 유명했다. 

애련당(愛蓮堂)
김병대(金炳大)가 지어 학문을 강구하며 유유자적했던 곳이다. 김병대(1875∼1926)는 자는 성도(聖道), 호는 만백(晩栢)으로 복흥면 사창리에서 태어났다. 김인후의 후손이며, 김상기(金相璣)의 아들이다. 순국지사 송병선(宋秉璿)의 문인으로 학문이 깊고 행실이 곧아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게 되자 애련당을 짓고 산수를 거닐면서 비분강개한 마음을 시(詩)로 풀었다. 저서로 《만백유고》(晩栢遺稿)가 있다.
송(宋)나라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애련설(愛蓮說)에 “연꽃은 맑은 물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으며 안은 비고 밖은 곧음을 사랑한다”며, “가련토다 밝은 달 갠 때가 하 많다”는 구절이 있다. 김병대도 혼탁한 세상에서 연꽃 혼자 고결한 자태를 선보이는 것이 애처롭게 보인다는 의미로, 연지(蓮池)에 있는 연꽃을 바라보며 누정 이름을 애련당(愛蓮堂)이라 하지 않았을까?

춘정(春亭)
이석간(李錫桿)이 복흥면 안산리에 지어 유유자적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호남문화연구》 23집에 전하고 있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회계(會稽) 땅 동산(東山)에 은거하면서 계속되는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은 ‘고와동산(高臥東山)’의 고사가 전하듯이 ‘유유자적(悠悠自適)’은 노는 것이 아니라 관직 등에 속박되지 않고 자율적으로 학문을 연마하겠다는 것이다.

후졸정(後椊亭)
복흥면 회동마을에 있던 누정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여기서 후졸(後椊)의 졸(椊)은 도낏자루로 졸(㯜)과 같이 쓴다. 이 단어에는 ‘도낏자루를 잡고 도낏자루가 될 나무를 베면서도 손을 다칠까 걱정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먼 곳까지 갈 필요 없이 가까운 곳에서 취하면 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로 《시경》 ‘벌가’(伐柯)에 “도낏자루를 잡고서 나무를 베어 도낏자루를 새로 만드는 사람이여, 자기가 잡은 도낏자루를 본받으면 되니 먼 데서 찾을 필요가 없도다”(伐柯伐柯 其則不遠ㆍ벌가벌가 기칙불원) 라는 말이 있다.

● 쌍치면 누정


낙요정(樂要亭)
김여중(金麗中)이 둔전리에 지은 서재 겸 강학소였다. 1957년에 편찬한 《순창군지》에 전하고 있다.

만호재(晩好齋)
쌍치면 유승렬의 소요처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1957년에 발간한 《순창군지》에 남아 있다.

물외정(物外亭)
고진욱(高震煜)이 쌍치면 쌍계리에 지어 은거했던 곳이다. 물외(物外)는 세상일을 잊고 초연하게 자연과 동화된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고진욱도 물외의 청산(靑山)과 녹수(綠水)가 자리한 곳에서 안비낙도의 처사(處士ㆍ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적 삶을 살며 비움의 순리를 터득하며 지냈을 것이다. 

송헌(松軒)
설규인(薛奎寅ㆍ1841~1912)이 쌍치면 양산리(陽山里)에서 학문을 강구하며 후진 양성에 일생을 바쳤던 곳이다. 설규인은 자는 왈오(曰五), 호는 송헌(松軒)이다. 성품이 따뜻하고 인정은 두터웠으며 1896(고종 33)년 유림의 추천으로 장능참봉(長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존되었다. 

쌍구정(雙龜亭)
유한용 등 12인이 오봉리 삼장마을에 결사(結社)하고 교유처로 삼았던 누정이다. 쌍구정은 구한말 의병들의 은신처 역할을 하기도 했고, 한국전쟁 당시 아군이 불태웠으나 지난 2019년 6월 복구되었다. 누정 주춧돌 4개가 삼장마을에 보존돼 있으며, 동학혁명 당시 지도자 전봉준을 도왔던 지역유지들을 기록한 벽면서체(암각서)가 남아 있다. 
서예가로 일세를 풍미했던 고당(顧堂) 김규태(金奎泰ㆍ1902~1966)가 쓴 <쌍구정 상량문>에 “구름 쌓인 곳 가리키니/ 아득한 신선의 땅 천년을 지나 더욱 깊고/ 거울과 같은 물 굽어보니/ 맑고 깊은 물줄기 아홉 굽이 멀리 안고 흐르네”라고 적고 있다. 

▲쌍구정.
▲쌍구정 벽면서체.
▲쌍구정 주춧돌 원형.

열락정(悅樂亭)
고재양(高載陽)이 일제강점기 때 쌍계리에 지은 서재 겸 강학소였다. 2012년 태풍 볼라벤으로 인해 무너진 후 복구되었다. 누정 이름은 ‘남에게 가르침을 베푼다면, 명민한 사람은 이 말과 글을 듣고 보고서는 점차 방향이 잡혀, 혹은 묻기도 하고 혹은 혼자 깨닫기도 하여 열락(悅樂)에 이를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누정 주인 고재양은 휘는 재양(載陽), 호는 간송(澗松)이다. 1930년 2월 세상을 떠나자 마을 주민들이 생전에 많은 사람에게 베푼 그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 유덕을 기리고자 쌍치면 쌍계리에 고재양 구휼 불망비(高載陽救恤不忘碑)를 세웠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선생은 매년 섣달이 되면 흉년으로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여 주니 모든 사람이 그의 행적에 탄복하고 기뻐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한마음으로 행동했으니 이를 잊지 않고 그 유덕을 잊지 않도록 비를 세웠다.” 
복흥면 비석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김병윤 옹이 누정기를 비롯해 시문 편액(詩文扁額) 등 5점을 보관하고 있다. 
 

▲열락정.
▲누정기 편액(김병윤 옹 소장).

풍욕정(風浴亭)
쌍치면 무이산 기슭에 있었던 홍원표(洪元杓)의 강학소였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풍욕(風浴)은 기수풍욕(沂水風浴)의 약자로 '바람으로 목욕한다.'는 뜻이자, 무욕을 수련하는 은거터를 의미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를 물었을 때 제자 여럿이 현실 정치와 관련된 뜻을 밝힌 데 반해 증점(曾點)은 “어른 대여섯 명과 아이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라고 하여 자연과 함께 하는 무욕(無慾)의 경지를 말했다. 

영광정(迎狂亭)
일제강점기에 뜻을 같이한 8명의 애국지사가 광인(狂人) 행세를 하며 은밀히 항일 투쟁을 벌인 뜻을 기리고자 건립한 누정이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하자 금옹(錦翁) 김원중(金源中ㆍ1860~1930)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 7명과 함께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면서 은밀하게 의병을 모집하고 물자를 준비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1년 6월 27일 항일운동 집회 장소였던 자리에 애국 동지 8명의 뜻을 높이 기리기 위해 누정을 세우고, 처마 끝에 태극팔괘를 새겨 망국의 설움을 되새기며 누정 이름을 영광정이라 했다. 
정면과 측면에 누정 이름을 새긴 현판 두 점이 걸려 있는데, 모두 김원중의 친필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면내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는데 영광정은 소실되지 않았다. 1990년 6월 30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영광정.

훈몽재(訓蒙齋)
조선 성리학의 거목(巨木) 김인후가 39세 되던 1548년(명종 3)에 부인의 고향인 쌍치면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이다. 
김인후가 처음 훈몽재를 지은 곳은 대학암(大學巖) 위쪽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돼 5세손인 자연당 김시서(金時瑞ㆍ1652~1707)가 1680년(숙종 6)에 원래 터 인근에 자연당을 짓고 기거하며 훈몽재를 중건해 후학을 양성했다. 일제강점기에 중건했으나 1951년 6ㆍ25 전쟁 때 소실되었다. 
순창군이 김인후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되살리고 전통문화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2009년 11월 9일 현재 위치에 훈몽재를 중건했다. 2012년 11월 2일 훈몽재 유지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훈몽재(강학당), 김시서가 자연당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한 자연당(숙박 시설), 김인후의 교육이념인 ‘몽이양정(蒙而養正, 어리석은 사람을 바르게 기름)’에서 따온 양정관(교육관ㆍ숙박시설), 김인후의 문학적 사상인 산(山)ㆍ수(水)ㆍ인(人)의 삼연(三然)을 구현한 삼연정(누정) 등으로 구성돼 있다. 

▲훈몽재.

※ 쌍치면 쌍구정과 열락정 탐사에 도움 말씀을 주신 고경무 쌍치면 부면장과 김호곤 삼장마을 이장, 김병윤 옹에게 감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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