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12) 금과면 고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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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12) 금과면 고례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0.2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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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 (12)

고례리(古禮里)는 금과면 북서쪽에 있는 고례마을과 송정마을을 합해 부르는 법정리 이름이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장수마을이자 조선 시대부터 과거급제자와 고위관료가 많이 나온 마을이다. 해방 이후부터 1990년대 말까지 사무관급 이상 관료만 40명 넘게 배출됐다. 2020년 10월 16일 기준 62가구에 106명이 등록돼 있다. 남자 50명, 여자 56명이다. 
 

▲고례마을 전경.

명칭유래

고례마을은 백제시대에 오(吳) 씨가 처음 정착해 살았다고 전한다. 북쪽에 있는 정골에서 새 터로 내려와 오(吳)ㆍ설(薛)ㆍ양(楊) 씨가 살았다고 한다. 원래는 예촌(禮村)으로 부르다 고례리로 개칭했다. 고례는 고승예불(高僧禮佛) 형상이란 말의 준말이다. 고승(보록산)이 목탁(청룡등)을 채(범덕굴 백호등)로 때리며 부처(아미산)에게 예불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마을 앞 비립등(비선등)에는 조성된 지 480년이 넘는 설준(정5품 창신교위 충무위 부사직) 묘가 있다.
송정마을은 200여 년 전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정착해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앞에 노송이 있고 그 주변에 평상바위가 있어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쉬어가곤 했다는데 이 소나무가 정자(누정)처럼 생겨서 송정리라 부르게 되었다.

▲송정마을 전경.
▲480년 된 설준 묘.

대표적인 장수마을

순창은 대표적인 '장수마을'이다.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 조사(2002년)에 따르면 순창군은 전국 234개 자치단체 중 인구 10만 명당 100세 이상 비율이 29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으로 나타났다. 타임지는 2003년과 2005년에 한국을 대표하는 제1의 장수마을로 순창을 선정하며 밥과 삶은 채소가 기본인 순창 식단을 장수 비결로 꼽은 바 있다.
금과면 고례리는 순창에서도 대표적인 장수촌이다. 조선 영ㆍ정조 때 정헌대부 동지중추부사였던 설세구가 92세까지 장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울대 인류학과 전경수 교수팀이 2005년 3월부터 2006년 10월까지 20개월 동안 전국 주요 장수촌을 대상으로 ‘장수촌의 가족사’를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고례리 주민은 집안 전체가 대대로 오래 사는 ‘장수 가족력’을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 고례리 주민의 평균 기대 수명은 91세, 60세 이후 기대여명(현재 나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명)이 31년으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평균 기대여명 19년보다 무려 12년이나 높은 수치다. 
가족 전체의 평균 기대수명도 유난히 긴 특징을 보였다. 고례리에서는 할아버지가 장수하면 아들도 장수하고, 아들도 그에 버금가는 수명을 누릴 수 있는 ‘장수 가족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연구팀은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시대적 외부 요인과 이 지역에 사는 가족들의 유전적인 요인이 결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소나무 숲 정문등

고례마을 앞에는 300년이 넘는 소나무 숲이 잘 가꾸어져 있다. 이 소나무 숲을 정문등(旌門嶝)이라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조선시대 숙종 때 설휘(薛徽)와 옥천조씨(玉川趙氏) 부인이 금실 좋게 살고 있었다. 설휘는 학문이 출중해 과거시험에 급제했으나 지병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부인도 남편을 잃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그 뒤를 따랐다. 이에 당시 유림들이 부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조정에 상소로 올렸다. 설휘는 정5품 상계(上階) 품계인 통덕랑(通德郎)에 증직(贈職,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됐고, 마을 앞 부지와 함께 정려가 내려왔다. 이곳에 정려문을 지어 정문이라 했고, 소나무 숲을 조성해 숲 이름을 ‘정문등’이라고 불렀다. 정문등은 오랜 세월 동안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백중이나 추석 때는 씨름과 들독놀이가 치러졌고, 현대에 와서는 면내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도 사랑받았다. 
그런데 마을주민들은 정문등 소유권이 국가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2010년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소유권 소송을 해 승소했다. 지금 정문등 소나무 숲은 고례마을 소유로 등기되어 있다. 
이후 마을주민들은 소나무가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태풍으로 부러지거나 고사 상태에 있는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고 복토하며 정성껏 돌보았다. 누정 유선정(遊仙亭)을 세우고 체육시설을 설치해 주민 휴식공간으로 다시 발돋움했다. 죽어가던 정문등 숲을 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로 지금은 고인이 된 양장희 전 군의원과 석관 최순성 등이 있다. 
정문등 이름다운 숲과 마을 사람들이 소송으로 되찾았다는 이야기는 2011년 10월 산림청 ‘숲 이야기 경진 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군도 정문등 복원사업에 팔을 걷어붙여 2015년 사업을 완료했다. 40그루 넘는 소나무 숲이 아름다워지자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 하여 사진작가와 관광객이 찾기 시작했고 마을의 명물이 됐다. 

▲소나무 숲 정문등.
▲옥천조씨 정려.

송정마을 기차 굴

한국 철도의 역사는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수탈’을 빼놓고는 성립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호소카와 가문이니 미쓰비시 재벌이니 하는 자본가들이 달려들어 전라선 등 여러 철도를 놓고, 놓으려 했던 것도 결국 수탈과 관련이 있다. 태생은 그러했지만, 일단 놓인 철길은 어떤 식으로든 식민지 조선의 산업과 많은 사람의 삶을 극적으로 바꿔놓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광주송정역(송정리역)에서 광주, 담양, 순창을 지나 남원 그리고 경남 진주, 마산까지 이어지는 철도 건설 계획이 있었다. 이 가운데 1922년에 서쪽 끝에 해당하는 송정리~광주~담양 구간이 먼저 개통됐다. 이를 ‘전남선’이라 불렀다. 송정리~광주 구간은 ‘광주선’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이후 대구까지 연장하는 '구남철도' 부설 운동이 일어났지만 1944년, 전쟁물자가 부족해진 일제가 공사를 중단하고 이미 깔려 있던 철길도 철거해 버렸다. 
하지만 그 흔적은 생생하게 남았다. 풍산면에 남아 있는 향가터널과 향가유원지 교각이 그 흔적이다. 그리고 또 다른 흔적이 있다. 바로 고례리 송정마을에 있는 기차 굴이다. 만약 이 철길이 이어졌더라면, 순창군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문재인 정부에서 공약한 ‘달빛내륙철도’ 건설을 떠올리며 든 생각이다. 
참고로 달빛내륙철도는 최고 시속 250킬로미터(㎞)의 고속철도로 광주~대구 간 203.7㎞ 구간을 연결하는 사업이다. 담양과 순창, 남원, 장수, 합천, 고령 등을 경유할 예정이며, 사업비만 4조850억 원에 이르는 대형 국책프로젝트다.

▲송정마을 기차굴.

벼락바위

송정마을 앞들에는 두 개의 큰 바위가 있다. 각각 둘레가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바위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아득한 옛날 아미산에 있던 큰 바위 하나가 아미산 산신령의 미움을 받아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위는 사람의 눈을 피해 이동하려고 밤중에만 움직였다. 그런데 워낙 육중한 바위라서 밤새 움직였으나 얼마 못 가,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때 송정마을에 사는 한 할머니가 논 일 하려고 새벽 일찍 들에 나오는데 큰 바위가 자기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할머니는 바위가 걸어온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바위는 할머니를 스치며 지나갔고, 할머니는 즉사하고 말았다.
바위는 아미산 신령의 미움을 받는 터에 이번에는 아무 죄도 없는 할머니를 죽게 해 그 죄가 더해졌다. 밝은 대낮인데도 먹구름이 일고 요란한 천둥소리가 나더니 벼락이 내려 바위를 두 개로 갈라버렸다. 바위는 무를 잘라 놓은 듯 반듯하게 잘려버렸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벼락바위라고 불렀다.(금성산성을 쌓을 때 여러 도인이 바위를 산성으로 몰고 가고 있는데, 이 광경을 본 송정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바위가 걸어간다” 소리치자 뇌성벽력과 함께 벼락이 치며 바위가 두 쪽으로 나뉘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바위가 있는 송정마을에는 기적이 나타났다. 역병으로 다른 마을은 많은 사람이 죽어갔으나 송정마을은 항상 무사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에 죽은 할머니의 넋이 깃들어 마을을 보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광주∼대구 간 철도공사 때 일이라고 한다. 노선이 이 바위를 지나므로 바위를 제거하기 위해 석공이 정을 들이대고 망치로 내리쳤다. 그러자 석공은 갑자기 구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수호신으로 여겨온 벼락바위가 현 위치에 그대로 보존되게 되었다고 한다. 

▲벼락바위.

‘욕심 많은 오 부자’ 전설

보록산(菩籙山)을 주산으로 하는 고례리는 예부터 오(吳)ㆍ설(薛)ㆍ성(成) 씨 등의 큰 부자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수백 년 전 고례마을에 천 석 거부 오 씨가 살고 있었다. 오 부자는 욕심이 많아서 매일 승려나 걸인이 시주나 동냥 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시주나 동냥을 주지 않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퍼 주자니 아까운 마음이 들어 못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옛날 농촌에서 분뇨를 운반하기 위해 나무로 통을 만들어 짊어지게 한 장군(일명 똥장군)이 있었다. 그는 장군처럼 생긴 나무통을 만들었다. 통 입구에 손을 펴서 넣으면 들어가지만, 주먹을 쥐면 손이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그 통에 쌀을 넣어 놓고는 시주나 동냥 온 스님과 걸인에게 가져가라고 했다. 나무통 입구에 손을 넣어서 그 속의 쌀을 한 줌 쥐어 빼려고 하면 주먹 쥔 손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쌀을 한 톨도 가져갈 수 없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이런 소문을 듣고 부잣집을 찾았다. 스님이 시주를 부탁하자 부자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장군을 내어놓고 그 속에 담긴 쌀을 가져가라 했다. 그러자 대사는 “부엌 앞에 있는 샘을 막아 버리면 시주나 동냥을 많이 하고도 더 큰 부자가 될 터인데 돈을 들여 나무통을 만들 필요가 뭐가 있냐”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된다는 말에 즉시 샘을 막아 버렸다. 
샘을 막고 돌아서자 난데없는 불덩어리가 날아다니며 부자네 집을 모두 태워 버렸고, 오 부자는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부엌 앞에 있는 샘은 진옹수라 하여 풍수설에 좋은 물이었는데, 이를 막아서 화를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희길 묘비

오희길(吳希吉ㆍ1556~1625)은 24세 때인 1579년 살던 집을 고창 향교 터로 내주고, 시집간 누이가 사는 순창으로 이거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서 태조의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무사히 지켰다. 이 공로로 사근도찰방과 태인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정쟁에 휘말려 1619년(광해군 11) 거제에 귀양 가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후 선산이 있는 고례리로 반장(返葬, 타향에서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 그 시체를 고향의 선산으로 가져다가 장례를 치르는 것)해 양지바른 언덕에 안장했다. 오희길 묘비는 1806년(순조 6)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홍문관 제학 조진관이 짓고, 임실 현감 이익회가 썼다. 금과면 고례리 산66-6번지 북쪽 기슭에 있다.

▲오희길 묘비.

예천사

예천사(禮川祠)는 1584년(선조 17) 조흡(曺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순창 유림과 후손이 고례마을에 건립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후손과 유림의 공의로 팔덕면 덕천리 태촌 마을에 다시 세웠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毁撤, 헐어서 치워 버림.)해 남아 있지 않다. 
퇴사헌(退思軒) 조흡(曺恰ㆍ?~1429)은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에게 나아가 태종 이방원과 함께 수학했다. 1400년(정종 2) 박포의 난에 공훈을 세웠다. 안산군수, 나주목사, 경상 우도 병마도 절제사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순창으로 내려와 후학 지도에 전념했다. 사후에 공희(恭僖)라는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를 증직했다.
현재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재실인 영사재(永思齋)가 예천사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팔덕 태촌마을 길을 따라 위쪽으로 가면 마을 어귀에 조흡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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