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역사(16) 고구려와 위나라의 1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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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역사(16) 고구려와 위나라의 1차 전쟁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1.04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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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고구려가 동천왕 때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이끈 군사들에게 수도 환도성(丸都城)이 도륙당하는 등 크게 치욕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정말 위나라 변방의 일개 장수인 관구검에게 씻을 수 없는 패배를 당했을까?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보면 중국은 위ㆍ오ㆍ촉 삼국이 쟁패를 하고 있었으며, 요동지역에는 공손씨가 자리를 잡고 고구려와 위나라, 오나라가 외교적 줄다리기를 하는 등 국제관계가 매우 복잡한 시기였다. 
요동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땅이었지만 역적 발기(發歧)가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탁에게 항복한 뒤 공손씨의 소유가 되었으며 공손탁은 스스로 요동왕(遼東王)이라 칭했다. 공손연(공손탁의 손자) 때에 이르러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했다. 이때 고구려와 위나라는 동맹을 맺었다. 고구려가 공손연을 치면 위나라가 돕고, 위나라가 오나라를 치면 고구려가 돕기로 했다. 오나라와 공손연 두 나라를 멸망시키면 오나라는 위나라에, 공손연의 요동은 고구려가 차지하기로 했다. 
이 동맹으로 위나라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치자 동천왕은 주부(主簿) 대가(大加)에게 수천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협조해 결국 요동의 공손씨는 3세 50년 만에 멸망했다.
공손씨가 멸망하자 고구려ㆍ위 동맹에 의해 요동지역을 당연히 고구려에 돌려주었어야 함에도 위나라가 배신하자 동천왕이 노해 위나라가 점령하고 있던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는 등 여러 차례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기를 느낀 위나라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침략했다.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 권28 ‘관구검 열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관구검이 고구려에게 여러 번 침략을 당해 이에 보기(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현도를 출발해 고구려를 토벌했다. 고구려 왕 궁(동천왕)은 보기 2만 명을 거느리고 진군해 비류수(沸流水) 상으로 가서 양구(梁口)에서 대전을 벌였다. 궁이 달아나자 관구검은 마침내 말과 수레를 묶어 환도성에 올라 고구려 수도를 도륙내고 1000명을 목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중략) 궁이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자 관구검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정시 6년(245년)에 다시 고구려를 정벌했다. 궁이 매구(買溝)로 달아나자 관구검이 현도태수 왕기(王頎)에게 추격하도록 했다. 옥저 땅 1000리를 지나서 숙신씨(肅愼氏) 남쪽 경계에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했으며 환도산에 ‘불내성(不耐城)’이라 새겼다. 8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논공을 하여 상을 받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라고 하여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 전체를 도륙내고 고구려의 왕은 도망가서 겨우 목숨을 건진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한 1차 전쟁은 고구려의 완벽한 승리였다. 고구려는 2만 명의 군사로 관구검의 1만 군사를 비류수에서 대파한 것이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0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000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했다”라고 되어 있어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승리했음을 보여준다. 동천왕이 허를 찔린 것은 2차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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