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누정(08) 인계면 · 적성면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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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누정(08) 인계면 · 적성면 누정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1.1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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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정.

● 인계면 누정

계산정(谿山亭)

묵제 양진갑이 도룡리에 지어 유유자적 했던 곳이다. 그는 오직 뜻을 산수에 두고 조선후기 최고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 최초의 순창군지 《옥천군지》(1760년)의 편찬 주역 지산 한치명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계산정은 사리봉이 맞은편 개심산과 마주 보고, 활처럼 휘감아 도는 양지천을 앞에 끼고 노란 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황계포란(黃鷄拘卵形) 형상의 자리에 있다. 세월이 흘러 무너진 것을 8세손 서강(瑞崗) 양상화(楊相化) 주도로 1998년 중건했다. 누정기는 김만수(金滿洙) 씨가 썼다. 

삼성당(三省堂)

양회영(楊會榮ㆍ1681∼1776)이 66세때인 1747년(영조23) 식년(式年) 생원(生員)에 오르기까지 학문에 정진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양회영은 인계면 중산리(中山里)에서 태어났다. 후진 육성에 남다른 열정으로 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 양진우(楊鎭禹) 등과 함께 천태산(天台山)과 풍산면 소재 옥출산(玉出山)에서 강학했다.
누정 이름 삼성(三省)은 증자(曾子)의 일일삼성(一日三省)의 준말이다. 증자(曾子)가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하노니, ‘남을 위해 도모함에 충성스럽지 않았던가? 벗과 사귐에 신의가 있지 않았던가? 전수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쌍매당(雙梅堂)
 

인계면 중산리(中山里)에 쌍매(雙梅) 양사민(楊士敏ㆍ1531~1589)이 학문을 터득하고 후진 양성에 주력했던 곳이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양사민은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중눌(仲訥), 호는 쌍매당(雙梅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귀암(龜岩) 양배(楊培), 아버지는 홍문관 전한(典翰)을 지낸 양홍(楊洪)이다. 1531년(중종 26)에 구미리에서 태어났다. 영특해서 많은 서적을 섭렵하고 통달했으나 영리를 취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익위(翊衛)로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만년에 뜰에 매화 두 그루를 심고 이곳 쌍매당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사형, 사헌 두 아우와 조카를 직접 가르쳐 문하에서 사마에 오른 사람이 8명, 문과 급제가 4명이나 됐다. 1808년 적성면 지북리 지계서원(芝溪書院)에 배향됐다. 
 
최락당(最樂堂)

양정기가 인계면 중산리에 지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양정기(楊鼎基)는 효우와 행의로 사림에서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겼다 한다. 이 당호는 위선최락(爲善最樂)의 뜻을 취한 것으로, ‘선(善)한 일을 하는 것은 인생 최대의 즐거움’이라는 의미다. 

 

▲어은정 현재 모습.
▲어은정 1930년대 모습.

● 적성면 누정

고려 무신 집권기에 문신이자 명문장가로 당대를 풍미했던 이규보(李奎報ㆍ1168~1241)가 그의 나이 32세 때인 1199년(신종2) 전주목사록(全州牧司錄)으로 보임해 12월에 전주를 떠나게 되었을 때 순창에 들렀다. 적성강과 채계산 절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가랑잎 같은 작은 배가 취옹(醉翁)을 태우니/ 석양의 행색(行色)이 병풍 그림이로다 / 평소 화산((華山ㆍ채계산)이 좋다고 들었더니 / 구름 낀 봉우리 푸른 하늘에 점점이 찍힌 것을 바라보기만 하네.” 

낙하정(落霞亭)
  
양시면(楊時冕)이 적성강변 천태산(天台山) 아래 평남리에 세웠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누정 이름 낙하(落霞)는 ‘낙하고목’(落霞孤鶩)의 준말이다. 당나라 왕발(王勃)이 지은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지는 놀은 짝 잃은 따오기와 나란히 날고”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인데, ‘깊은 가을날의 저녁 경치’를 절묘하게 묘사한 표현으로 회자되었다. 
양시면(楊時冕ㆍ1585~1626)은 적성면 구남리에서 어은정 주인 양사형(楊士衡)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자의(子儀), 호는 낙하정(洛霞亭)이다. 1613년(광해군 6)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폐한 뒤 처형하고, 인목대비마저 폐위하려고 성균관에 연명 상소를 올리라고 강요하니 대부분의 관생들이 짐을 싸서 낙향했다. 당시 성균관생이던 양시면도 <장안곡>(長安曲)이라는 시를 짓고 고향으로 돌아왔고 낙하정을 지어 여생을 보냈다. 광해군 주변 간신들을 풍자한 <장안곡>(長安曲)은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대액지 근처에 푸른 오동나무 있는데
갈가마귀 떼 지어 모여드니 봉황의 자리 없네놀란 봉황은 어느 곳으로 떠나갔을까 
바다 밖 무릉도원을 세상은 알지 못한다네
양시면이 낙하정(落霞亭)에서 지낼 때 고향의 아름다운 사계절 풍광을 그려 만든 병풍그림에 읊은 제영시(題詠詩)가 <병풍팔영>이다. 다음은 그중 가을 그림을 보고 읊은 시다. 

궁궐은 희미하게 안개 속에서 빛나고 
붉은 누각은 가파른 낭떠러지를 가리우네 
어느 곳을 생각하는가, 고향의 나그네여 
가을바람은 돛 걸기에 좋구려 
작은 배에 앉아 거문고 타고 
맑은 물결 희롱하며 발을 씻네 
달빛에 갈대꽃은 밝게 빛나는데 
홀로 술잔을 기울이려니 마음이 어떠한지

만귀대(晩歸臺)
 
조두현(曺斗鉉)의 소요처였다. 채계산 석문 안에 있었다고 《조선환여승람》(1935년 편찬)에 전하고 있다.

반선정(伴仙亭)

'신선과 짝한다'는 의미의 반선정(伴仙亭)은 적성강 변 채계산 아래 중연 위에 있던 누정이다. 1766년(영조42) 이후 편찬된 《순창군읍지》에 이미 사라졌음을 알리고 있다.
누정 주인 반선(伴仙) 양공말(楊公抹ㆍ1502~1560)은 임실군 삼계면 아산리에서 태어났다. 학문이 깊어 조정에서 사산감역(四山監役)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말년에 아름다운 산수를 조감할 수 있는 채계산 기슭 적성강 변으로 이주해 학문을 강구하며 당대 명사들과 교우하며 풍류를 즐겼다. 
호남실학 4대가 중의 한 사람인 황윤석(黃胤錫)이 1787년(정조 11) 일기문 형태로 정리한 《이재난고》(頤齋亂藁) ‘고사산 감역 반선정 양공전’(故四山監役伴仙亭楊公傳)에 의하면 "당시 김인후ㆍ소세양ㆍ임억령 등 명사(名士)들의 시가 반선정(伴仙亭)에 걸려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다음은 하서 김인후가 지은 <차반선정운>(次伴仙亭韻ㆍ반선정 시 운자를 따서 짓다)의 서사다. 

이야기를 들으니, 강변의 호사가 노인이
백운을 시제(詩題)로 읊어 배 안에 걸었다네.
다만 지금은 모래톱에 달빛만 찬란할 뿐
꿈속의 푸른 물결은 눈을 드니 비었네.

어은정(漁隱鄭)과 영하정(映霞亭)
  
적성면 평남리에 적성강변을 바라보고 선비의 고고함을 느끼게 하는 어은정이 자리한다. ‘어은’(漁隱)은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낙향한 선비들이 내수어(內水魚)가 많이 나는 이곳 적성강에서 낚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누정 주인 양사형(楊士衡ㆍ1547~1599)은 1547년(명종 17) 동계면 구미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평(季平), 호는 영하정(暎霞亭)ㆍ어은(漁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양배(楊培), 아버지는 양홍(楊洪)이다. 33세에 생원시, 42세에 식년 문과에 급제했고, 이후 군자감(軍資監)의 봉사(奉事)ㆍ직장(直長) 등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벼슬을 사임하고 남원으로 낙향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을 모아 금산의 전쟁터로 보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활동하며 남은 왜적을 물리쳤다.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은정은 양사형이 1567년(명종 22) 혼인한 후 동계면 구미리에서 재 너머인 평남리 구남마을로 분가하면서 세운 것이다. 처음에는 영하정(映霞亭)이라 했는데, 여러 차례 중건되는 과정에서 양사형의 호를 따서 어은정(漁隱亭)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건물은 1919년에 고쳐 지은 것이고, 1991년 기와와 목재를 보수했다. 1990년 6월 30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32호로 지정되었다.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약간 경사가 있는 뒤쪽 담장 밖에서 앞의 섬진강을 바라보면 누정 지붕선과 앞으로 펼쳐진 드넓은 평야가 멀리까지 조망된다. 어은정 누마루에 올라서면 물 흐름이 아름다운 섬진강이 내려다보인다. 누정 주위에는 수령 100년이 넘는 백일홍 수십 그루가 심어져 있다. 
편액으로는 어은정 현판을 비롯해 9세손 양재회(楊在晦)의 <어은정 중수기>, 양진영(楊璡泳)의 <구남어사서>(龜南漁社序), 9세손 양재전(楊在田)의 시문, 윤병관(尹秉觀)의 시문 등이 걸려 있다. 그 가운데 당시 지방관이던 윤병관의 <어은정에 제하다>(題漁隱亭ㆍ제어은정)는 1892년 4월 상순에 지은 것으로 새겨져 있다. 전반부는 누정의 옛 주인인 양사형의 기상을 추모하고, 후반부는 아름다운 누정을 노래한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맑은 바람 한 오라기 흔들리지 않았는데어떻게 차마 당시 성조(聖朝)를 떠나셨을까산 위에는 오늘까지 밝은 햇살이요물속에는 예전처럼 붉은 노을 비춰 있네빈 난간 솔바람 소리엔 세속적인 꿈 깨치우고뜰 가득한 풀빛엔 나그네 마음 녹아지네사람은 옛 정자에 은둔했으나 정자는 아직 숨지 못해뒤에 오는 길손들 매양 이곳을 소요하네

읍취정(挹翠亭)

송백이 뒤늦게 시들어 푸른빛을 기뻐한다(松柏後凋欣挹翠)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읍취정(挹翠亭). 최홍연(崔弘沇)이 소요처로 지어 지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1957년에 발간한 《순창군지》에 전하고 있다.

찬하정(餐霞亭)
  
적성강변 채계산 중턱에 있던 누정으로, 조선중기 유학자였던 양항(楊沆ㆍ1528~1593)이 지었다. 그는 귀암(龜巖) 양돈((楊墩)의 후손으로 자는 청경(淸卿)이고 호는 찬하정(餐霞亭)이다. 선조 때 천거로 세마(洗馬)에 제수 됐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며 처사(處士ㆍ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의 삶을 살면서 여생을 보냈다. 양만정이 지은 《남원양씨세적집요》와 1957년에 편찬한 《순창군지》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화서정(華西亭) 
 
조선 중기의 문인 최추(崔湫ㆍ1477~1538)가 현감 등을 지내다 말년에 적성면 구례산 기슭에 지어 퇴휴처 겸 강학소로 사용했다. 누정명 화서(華西)는 최추의 호다. 적성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누정은 사라지고 없고 1935년에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 최추의 제액과 기문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 《순창군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조선환여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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