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리는 왜 ‘공정'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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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는 왜 ‘공정'해야 하는가?
  • 한상진 대변인
  • 승인 2020.11.2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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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상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대변인

첫 청년의 날과 오래된 공정
많은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은 ‘조선시대엔 양반만 과거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조선시대엔 양인이라면 누구나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귀족들이 부와 권력을 세습하던 전조 고려의 폐해를 극복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시험을 통해서만 관료를 선발하는 능력 중시 사회를 공정한 사회라고 한다면 조선은 그야말로 공정한 사회였다. 그러나 실제론 가난한 농가의 자제, 저잣거리에서 날품을 팔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제들은 과거에 합격은커녕 응시조차 할 수 없었다. 조세와 노역에서 자유로웠던 부유한 양반들은 계속 과거에 합격해 입신양명하며 부와 권력을 늘려갔다. 일하기 바빠 글자도 배우기 어려웠던 가난한 농민들은 그저 계속 가난했다. 조선은 과연 공정한 사회였는가.
공정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사건의 어느 지점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더 공정하거나 덜 공정할 수 있다. 어떤 것을 특혜로 볼 것이냐도 마찬가지다. 특혜를 가능하게 한 권력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어느 지점에 작용하는지에 따라 특혜의 범위도 달라진다. 고위공직자의 자녀가 대학 입시에서 특혜를 받는 것‘만’ 불공정이라고 인식하면 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초고액의 과외를 받으며 (입시 비리도 필요 없이) 대학에 입학하는 부유층의 자녀들에겐 특혜나 불공정을 말할 수 없게 된다. 가장 공정한 과거시험 제도를 갖추고서도 가장 불공평한 신분제의 사회였던 조선시대처럼.
하여 맥락과 과정을 거세한 채 기존의 절차와 규칙의 준수로만 ‘공정’을 단순하게 인식하는 태도는 오히려 불공정을 야기한다. ‘공정’을 알리바이 삼아 기존의 절차가 만들어놓은 ‘불공정’을 고착시키는 모순을 가져온다. 공정은 불평등하고 분절된 세계에서 규칙을 준수하는 ‘순간’이 아니라 더 공평하고 더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과정’으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왜 공정해야 하는가?” 혹은 “공정이란 무엇인가”. ‘공정’을 말하기에 앞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그것이다.
공정의 문제는 시험과 경쟁에서 불거진다. 최근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불거진 이른바 ‘인국공 사태’가 대표적이다. 날로 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인천공항공사는 취업 준비 중인 청년들에게 꿈의 직장으로 여겨졌고 공사 입사를 위한 취업 경쟁은 과열됐다. 이런 상황에서 과열 경쟁을 통과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공사의 정규직이 된다는 것을 ‘불공정’으로 인식했다. 모두 똑같이 과열 경쟁을 통과하는 것만이 공정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공정이다. 공정이란 공평함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경쟁에서 승리할 것을 강요하고 탈락자의 실패를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공정을 알리바이로 불공정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공정이란 올바른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정의 의미란 그런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년의날 기념식 연설에서 ‘공정’을 37번 언급했다. 대통령은 ‘인국공 사태’를 거론하며 “때로는 하나의 공정이 다른 불공정을 초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틀렸다. 대통령의 말은 ‘잘못된 공정의 개념이 오히려 불공정을 초래한다’로 바뀌어야 한다. 공정의 의미는 약육강식이 아니라 상호부조에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하더라도 노동의 가치 자체엔 차별이 없게 하는 것, 성적과 스펙이 삶의 존폐를 흔들어선 안 되게 하는 것이 공정한 사회라고 말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니 특수고용이니 하는 구분 없이 노동의 가치를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공정이라고 말해야 한다. 의사는 전교 1등의 일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의 직업이라 말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이 되는 것이 불공정이라는 이들에게, 경쟁에서의 승리만이 공정한 절차의 준수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전교 1등만이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이들에게, 우리는 왜 공정해야 하는가? 공정의 의미란 무엇인가?

한겨레 2020.9.23.일치 오피니언 ‘왜냐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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