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역사(17) 고구려와 위나라 2차 전쟁과 동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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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역사(17) 고구려와 위나라 2차 전쟁과 동천왕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2.02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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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전 승리에 자만한 동천왕은 철기병 5000여 명을 거느리고 위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승리감에 도취된 동천왕의 조급한 공격은 큰 실패로 나타난다. 자만심에 빠져 넓은 평원으로 유인된 고구려군은 관구검과 왕기가 이끄는 군대에 대패해 당시 병력 2만여 가운데 죽은 자가 1만8000에 이른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기’). 동천왕은 겨우 살아남은 1000여 명의 기병을 데리고 압록원(鴨綠園)으로 피신한다. 
같은 해 10월에는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을 쳐들어와 왕기에게 동천왕을 추격하게 했다. 고구려는 왕족을 포함해 모두 산맥을 넘어 남으로 옥저까지 피신한다. 관구검은 환도산에 올라 고구려의 수도를 파괴했는데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수천 명이 되었다고 한다.(<위서> ‘관구검전’) 그러던 가운데 고구려 지도부는 고구려군 최후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후퇴하는 길목에서 대응한다. 《삼국사기》에는 밀우와 유유의 활약상이 잘 나타나 있다. 밀우는 결사대를 조직해 위나라 군사에 맞서 싸우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후퇴하는 임금의 퇴로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유유는 적진으로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을 하려 하니 위나라 장수 왕기가 그의 항복을 받으려 했다. 이때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고 나아가서 칼을 뽑아 왕기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지휘관이 갑자기 죽자 위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고 동천왕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했다. 위나라 군사들은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퇴각한다. 고구려군은 환도성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천왕이 죽자 슬퍼하지 않는 백성이 없었다 한다. 아들 중천왕이 금지했지만, 막상 장례일이 되자 왕릉에 와서 스스로 죽으려 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다소 과장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밀우와 유유가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 동천왕을 지킨 예화도 동천왕이 신하들로부터 애정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보다 동천왕의 참모습은 당시 국제 정세를 적절히 이용해 고구려 대외정책을 추진할 만큼 탁월한 안목을 갖춘 왕이라는 데 있다. 당시 중국은 위ㆍ오ㆍ촉 삼국으로 나뉘어 쟁패를 다투고 있었으며, 여기에 요동 땅에는 공손씨 정권이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종종 고구려와 충돌하고 있었다. 동천왕은 이런 국제 정세를 이용해 고구려의 대외전략을 새롭게 짜나갔다. 
결과적으로 보면 동천왕의 서안평 공격은 위나라를 자극하여 환란을 불러온 오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천왕은 군사력에서 관구검 군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서안평을 공격한 것이다. 이는 개전 초기에 동천왕이 이끄는 고구려군 2만이 관구검의 군대를 비류수와 양맥에서 연거푸 격파한 데서 알 수 있다. 후일 미천왕이 서안평을 공격하고 이어서 낙랑을 병합했는데, 이러한 대외전략을 동천왕이 이미 마련했던 것이다. 비록 한 번의 패전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는 동아시아의 패자로 성장하기 위한 한때의 시련이었을 뿐이다.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운 고구려인들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모색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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