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16) 유등면 오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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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16) 유등면 오교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2.0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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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 (16)
화산서원과 오교리산성의 고장

오교리(梧橋里)는 유등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유등면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무수리가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인계면 지산리가 있다. 서쪽으로는 건곡리, 남쪽으로는 유촌리와 외이리에 접한다. 한때는 120가구가 넘게 사는 큰 마을이었다. 2020년 11월 30일 기준 인구는 74가구, 113명으로 남자 58명, 여자 55명이다. 토착 성씨로 화순 최씨(和順崔氏)와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있다. 

▲오교리 전경.

마을 유래

오교리 옛 지명은 이두식 표현으로 머드리였다. 머드리는 머드러기의 방언으로 ‘과일이나 채소ㆍ생선 따위의 많은 것 가운데서 다른 것들에 비해 굵거나 큰 것’이라는 뜻이다. ‘오(梧)’ 자는 오동나무를 뜻하기도 하지만 ‘크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오기리(梧基里)’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시냇물에 오동나무 교량이 있어 오교리(梧橋里)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적성 채계산이 화산(火山)이기에 화재가 자주 일어나 불의 재앙을 막아 보려고 채계산이 보이는 곳에 느티나무와 소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1997년 마을 앞 광장을 조성했고, 오봉정(梧鳳亭)이라는 누정을 세웠다.

주요 지명

서우내(서원재) : 화탄 앞 양수장이 있는 곳으로 지형상 물소의 형상처럼 보이는 곳을 서우(犀牛)내, 또는 서원재라고 부른다. 하서 김인후와 여암 신경준 등의 위패를 모셨던 화산서원(花山書院)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성재(城峙ㆍ성치) : 오교리 북쪽 큰까끔 넘어 순창과 남원 간 국도변 섬진강 가에 158m 높이에 돌로 쌓은 성이 있다. 여기를 성재(城峙ㆍ성치)라고 부른다. 

어무래 : 오교리 작은마을과 큰마을이 순창으로 가다 마주치는 길목이다. 예전에는 낮은 언덕배기의 고갯길이었으며, 그 옆에 냇물이 흐르고 있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물레방아가 있던 곳이다. 일설에 의하면 오교리 작은마을 뒷산 형상이 승천하지 못하고 용이 못 된 이무기의 형상이라 하여 뱀의 머리를 가리키는 이무래라 하였다 한다.

오교리 선돌

오교리는 풍수 형국상 ‘자봉포란형(雌鳳抱卵形ㆍ암컷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알려졌다.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속말이 있다. 실제 오교리는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이에 시냇물이 흘러서 두 마을을 오고 가려면 다리를 건너다녔다. 다리 양쪽 시냇가에는 오동나무가 있고, 윗마을 뒤에는 대나무가 무성했다고 한다. 이렇듯 오교리 지명은 마을 풍수에 따라 암컷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풍요로운 마을을 조성한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오교리 선돌은 윗마을에서 아랫마을로 건너는 다리 양쪽에 세워져 있다. 지금은 다리를 덮어 길이 되었지만, 예전에 시냇물이 흐를 때 다리를 건너기 전 길 양쪽에 세워 놓은 것이다. 다리는 윗마을의 마을 입구가 되는 곳이다.선돌은 2기로 모두 자연석이다. 오른쪽 선돌은 높이 130센티미터(㎝), 폭 30㎝, 두께 32㎝이고 왼쪽 선돌은 높이 158㎝, 폭 90㎝, 두께 58㎝이다. 마을 풍수와 관련해 조성된 선돌로 신앙 대상으로 섬기지는 않는다.예전에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이에 시냇물이 흐르고 다리를 건너 위아래 마을을 오갈 때는 다리 양쪽에 있는 오동나무가 아름답고 마을 선돌도 그 안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길이 포장되어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고, 선돌 2기만 옛 마을 경관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오교리 선돌 중 하나.

오교리산성

순창읍에서 남원시 방면 국도 24호선을 따라가면 5킬로미터 지점에 적성면 지북리와 유등면 오교리와 경계를 이루는 태자삼거리가 나온다. 태자삼거리에서 남쪽으로 가리산을 300여 미터 오르면 가리산 산정이 나오고, 여기서 다시 250미터 동쪽으로 가면 해발 158.5미터의 산봉우리가 나온다. 오교리산성은 이 봉우리 둘레에 축성되었으나 대부분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오교리산성은 유등면 오교리와 적성면 지북리 경계를 이루는 가리산 정상부에 있는 삼국시대 석성(石城)이다. 섬진강 변에 자리하면서 수로를 이용한 교통로를 감시하는 한편, 백제 역평현(현재 적성면)의 피난성 또는 치소성으로 기능하다가 후삼국 통일 후 필요성이 없어져 자연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에 대한 기록은 1942년 출간된 《조선 보물고적 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만 남아 있다. “성지(城址), 유등면 오교리 사유림 주위 약 220간(間)의 석축으로서 현재 거의 붕괴되어 주위에 전석(轉石)이 있는 데 불과하다. 성내에는 정호지(井戶址) 하나와 와편(瓦片)이 다수 산재한다”는 내용이다.
오교리산성은 가리산 북쪽 산자락 봉우리를 둘러쌓은 테뫼식 석성으로, 평면 형태는 네모반듯한 모양에 가깝다. 성벽 둘레는 약 250미터로 작은 규모다. 산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나무가 우거져 있고 낙엽이 많이 쌓여 있어 성벽 흔적을 관찰하기 쉽지 않다. 성벽이 비교적 남아 있는 곳은 동벽으로, 그 높이는 3미터 내외이나 대부분이 무너져 있고 기와와 토기 조각이 널려 있다. 성문은 세 곳으로 보고되었으나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남동쪽과 남서쪽, 그리고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동쪽에 있는 섬진강은 자연 해자 역할을 겸했으며 강 쪽을 향해 남문이 설치되어 있었던 같다. 

▲가리산.
▲오교리산성 터.

신경준 묘비

순창읍에서 국도 24호선을 따라 남원 방향으로 가다가 지산 사거리를 지나면 태자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섬진강을 따라 형성된 산자락 중턱 너머 화탄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신경준 묘가 있다. 
화강암의 네모반듯한 대석(臺石) 위에 오석(烏石)으로 비신(碑身)을 세우고 화강암 옥개형 개석을 올렸다. 비신은 높이 115센티미터(㎝), 너비 44㎝, 두께 19㎝다. 새로 세운 비가 구비(舊碑) 옆에 나란히 있다. 신비(新碑)에는 신경준의 행적을 기록한 음기가 새겨져 있다. 구비는 글씨를 판독하는 데 어려움은 없으나, 측면의 간지는 마모되기 시작한 상태이다. 고령신씨(高靈申氏) 종중에서 소유ㆍ관리한다.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ㆍ1712~1781)은 조선 영조 때 최고의 지리학자이자 실학자로 신말주 11대 손이다. 순창읍 남산마을에서 태어나 1781년(정조 5년) 70세에 사망해 이곳에 묻혔다. 신경준은 ‘조선의 산맥체계를 도표로 정리한 《산경표》(山經表) 저자로 알려져 있다.《산경표》는 국내 산행방식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산경표》가 재조명되기 전의 국내 산행은 어느 한 산을 정해 정상을 오르내리는 ‘점 산행’이 대부분이었지만 《산경표》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후, 산줄기를 이어가는 ‘선 산행(종주산행)’ 즉 백두대간 종주가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신경준 묘비.

화산서원

화산서원(花山書院)은 유등면 오교리에 있던 조선 후기 서원이다. 1607(선조 40)년 9월 8일 순창군 유림의 공의(公議)로 신말주ㆍ김인후ㆍ김정ㆍ고경명ㆍ김천일 등의 학문과 덕행,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그 이듬해 위패를 봉안했다. 그 후 박상ㆍ유옥ㆍ신공제ㆍ양사형ㆍ김시서 등을 추가로 배향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이 가운데 순창 출신 인물로는 신말주(申末舟)와 그의 손자 신공제(申公濟), 김인후(金麟厚)와 그의 6세손 김시서(金時瑞), 그리고 양사형(楊士衡) 등이 있다. 비순창 출신으로는 의병장으로 유명한 고경명ㆍ김천일은 순창군수를 역임했으며, 김정(金淨ㆍ순창군수)ㆍ박상(朴祥ㆍ담양부사)ㆍ유옥(柳沃ㆍ무안현감)은 함께 강천산 삼인대에 관인(官印)을 걸어 놓고 중종반정으로 폐출된 중종의 원비(元妃)였던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복위 상소를 올렸다. 
화산서원은 사액서원(賜額書院ㆍ조선시대에 왕으로부터 서원명 현판과 노비, 서적 등을 받은 서원)의 전례를 받지는 못했지만, 사액서원과 같은 모든 의례가 시행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 헐어 치워 버림)되었다.
위치는 유등면 저탄(猪灘) 상(上)으로 기록되어 있다. 순창군지에 의하면 훼철되기 전 건물로는 현전(賢殿)ㆍ신문(神門)ㆍ동서협문(東西夾門)ㆍ강당(講堂)ㆍ전사청(典祀廳)ㆍ고사(雇舍)ㆍ대문(大門) 등이 있었다. 서원 터로 추정되는 근처에 신경준(申景濬) 묘가 있으며, 서원이 있던 야산은 지금도 서원재 또는 서우내라고 불린다.

▲서우내.
▲화산서원 터.

 

화순 최씨 효열비ㆍ정려

화순 최씨 효열비 정려(和順崔氏 孝烈碑 旌閭)는 오교리 화순 최씨 가문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오교리 북쪽 도리산 산기슭에 있다. 재각 안에 비석 2기가 있고, 인근에 석정려 2기가 있다. 최영국 효행비와 최윤문 처 김해김씨 효열비는 비석 형태이며, 최길영 처 김해김씨 효열지려와 최문석 처 안동권씨 효열각은 석정려(石旌閭) 형태다.

▲김해김씨 효열지려와 안동권씨 효열각.
▲최영국 효행비와 최윤문 처 효열비.

가운데 샘

오교리 가운데 샘은 2~3개 되는 마을 우물 가운데서 물의 양이 가장 많았다. 주민들은 샘을 신성시하고 마을에 애경사가 있을 때는 샘을 잘 관리해 깨끗한 물로 음식을 장만해 사용했다. 마을에서 상여가 나갈 때는 우물을 덮고 출상이 끝나면 샘물을 품어내고 깨끗이 청소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정월 14일 보름 안 날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냈는데 이때가 되면 샘에 금줄을 치고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제한하고 통제했다. 마을 풍물패들이 제일 먼저 샘 굿을 치고 지신밟기를 실시했다고 한다. 추석과 설 명절에도 금줄을 치고 청소를 깨끗이 한 뒤에 샘물로 음식을 장만하곤 했다. 

가치양수장
 
제 28대 강상원 군수(1977.05.01∼1978.07.31)는 1977년 취임하자마자 순창군민의 숙원 사업이었던 양수장 건설 사업에 적극, 나섰다. 당시 가치양수장은 도수관로가 높아 난관을 돌파해야만 했다. 섬진강 표류수를 취수하여 오교리 큰까꿈산 서운골을 넘어가는 해발 150미터를 넘겨야 하는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 
가치양수장은 유등면 오교리 6번지에 취수탑과 취수펌프 50마력(HP) 3대와 기계관리사 1동의 취수시설을 갖추었다. 섬진강 표류수를 취수하여 유등면 오교리 일대, 인계면 노동리, 지내리 일대와 순창읍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했다. 당시 준공식에는 황인성 도지사를 비롯해 군민 다수가 참여했고, 1978년 양수장 건설 후에 유등정수장 또는 순창정수장으로 불렀다 
도수관로는 3.3킬로미터와 배수지 3지, 배수관로 11킬로미터와 가압장 1동을 설치했고, 순창읍 남계리에 정수시설과 급수 보조공, 지하수 8공으로 순창읍 순화ㆍ남계ㆍ가남ㆍ신남리에 식수를 공급했다. 섬진강 물줄기를 끌어 올려 주민 식수를 오염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문화도시 순창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가치양수장이 있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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