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17) 인계 세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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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17) 인계 세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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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2.16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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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 (17)

세룡리(細龍里)는 인계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동쪽에 적성면 석산리, 서쪽에 마흘리, 남쪽에 적성면 대산리, 북쪽에 심초리가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세룡ㆍ선월ㆍ둔기마을을 합해 세룡리라 했다. 세룡리 인구는 2020년 12월 14일 기준 57가구, 112(남자 59, 여자 53)명이다. 

▲둔기마을 전경.
▲세룡마을 전경.
▲선월마을 전경.

마을 유래
 
세룡마을은 마을 뒷산이 서룡산(瑞龍山)이고, 상서로운 용이 비를 뿌리는 서룡쇄우(瑞龍灑雨) 형상이어서 서룡(瑞龍)으로 불리기도 했다. 1450년(문종 즉위년) 고령 신씨(高靈申氏)가 맨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북쪽 두류봉 아래 선달굴이라 부른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선월리라 하고 세룡리에 병합됐다. 교통이 불편하고 두메산골(산간오지)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버려 아무도 살지 않는 폐촌이 되었다가, 최근 귀농인들 몇 가구가 새로 들어섰다. 
둔기마을은 세룡리에서 남쪽으로 솟은 장군봉 아래 형성되었다. 장군이 진을 친 장군둔기(將軍屯基) 형상으로, 둔기(屯基)란 진터란 뜻이다. 후백제 견훤(甄萱)의 전쟁터였다고 전한다. 

세룡리 느티나무 전설

세룡마을 입구에는 수령 300여 년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보호수(제9-12-5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형이 워낙 크고 아름다워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느티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마을 앞 냇가에 승천할 시기가 꽉 찬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마을에 사는 한 노인의 꿈에 이무기가 나타나서 승천하려 하는데 뒷산이 보여서 승천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을 입구에 나무를 심어 그 뒷산을 가리도록 해 주면 승천을 할 수 있을 것이니 도와 달라고 했다. 
잠에서 깨어난 노인은 마을 사람들과 의논해 마을 입구에 나무를 심었다. 나무가 자라서 뒷산을 가리게 되자 이무기는 승천할 수 있게 되었고, 용이 되어 마을에 재앙이 일어나지 않도록 마을을 보살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봄이 오면 이 느티나무에 나뭇잎이 피는 것을 보고 농사일을 점친다고 한다. 느티나무 잎이 한 번에 피면 모내기도 한 번에 끝나고, 느티나무에 잎이 두 번 피면 모내기도 두 번 해야 된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승천한 이무기가 용이 되어 이 나무를 통해 농사일을 알려 준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느티나무를 보호하고 있다. 

▲세룡리 느티나무.

세룡리 돌탑

세룡리 돌탑은 세룡마을 수구가 넓어 풍수상 기(氣)가 빠져나갈 허점을 보완하고, 마을의 기를 보전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조성한 수구막이 돌탑이다. 
과거 할머니와 할아버지 탑이라 불리는 2기의 돌탑이 있었다는데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도로를 확장하면서 돌탑 부재를 깨트려 마을 진입로 공사에 사용하면서 없앤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젊은이가 죽고 어른들이 경운기에서 떨어져 죽는 등 인명 사고가 잇따르자 마을 주민들이 합심해 돌탑을 복원하기로 했다. 마을 청년들은 산과 골짜기를 돌아다니며 돌탑 부재를 확보해 경운기로 실어 나른 끝에 2일 만에 돌탑을 원래 위치에 복원했다. 
현재는 마을 입구 진입로 왼쪽에 1기가 조성되어 있다. 돌탑은 원통형으로 쌓았으며, 탑심이라 할 수 있는 선돌 2개가 돌탑 상부에 세워져 있다. 

▲세룡리 돌탑.

차나무 자생단지 

우리나라 자생 차(茶)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 같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야 김수로 왕의 왕비가 된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가 종자를 가져와 김해 백월산에 있는 죽림 내에 심었다고 하고, 《삼국사기》에는 828년(흥덕왕 3)에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종자를 들여와 지리산에 심었다고 한다. 고구려 고분에서도 차가 출토되었으며,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 최고령 차나무가 존재하는데 수령이 신라시대에 거의 닿는다고 한다. 고려시대까지 차 문화가 번성했으며 대부분 왕실과 귀족, 승려 층에서 소비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차 문화의 주도권이 양반가와 정부로 넘어가게 된다. 숭유억불정책과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사치품이었던 차는 일상적인 음다(飮茶)문화의 중심에 나타나지 않게 되다가 조선 후기 들어 선비들과 승려 간에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다시 시류의 중앙으로 돌아오게 된다. 
순창 차(茶)는 조선왕조 내내 공납품으로 진상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ㆍ《동국여지승람》(1481)ㆍ《신동국여지승람》(1530)ㆍ《대동지지》(1864) 등 여러 고서에 기록돼 있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 2년에 걸쳐 현지답사와 설문 조사를 토대로 작성한 〈우리나라 차나무 분포 조사표〉에 따르면 전라북도의 경우 고창ㆍ김제ㆍ부안ㆍ익산ㆍ정읍ㆍ순창 등 14개 지역에 야생 차나무밭이 확인되었다. 순창군의 경우 순창향교 뒤, 적성면 석산리, 구림면 안정리 만일사, 인계면 세룡리 주변 등 4곳이다. 
순창 차 산지 중에서 자료 연구가 있었던 곳은 인계면 세룡리 차다. 세룡리 뒷산 서룡산 두류봉 아래 소나무 숲에는 지금도 야생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 면적은 약 5000평이다. 순창 지역은 불교가 성했던 지역으로 많은 사찰이 있었다. 따라서 차가 많이 필요했었다. 고려시대 때는 궁궐뿐만 아니라 큰 사찰에도 차를 공납했는데, 사찰이나 폐사지 주변에서 오래된 차나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룡산 차나무 자생단지 - 순창문화원 제공.

세룡리 절터

세룡리에서 동북으로 가파른 암벽 길을 따라 약 10여 분 정도 올라가면 길 가운데 절구처럼 생긴 바윗돌이 있다. 여기서 10미터 정도 올라가면 산 위에 작은 논과 밭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지역이 바로 주민들이 폐사지로 추정하며 불당재(佛堂峙) 혹은 불당동(佛堂洞)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불당동은 승려들이 공부하는 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이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여기에 과거 절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세룡리에 있던 절이 언제 창건되고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에 나타난 자료를 고증해 보면, 177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 순창조에 “서룡사(瑞龍寺)는 지금 폐사되었다(瑞龍寺今廢)”라는 부분에 근거해 세룡리 절터 사명(寺名)을 서룡사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세룡리 절터에 남아있는 마애불상 등을 통해 볼 때 꽤 큰 절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변에 샘이 하나 있는데 옛날 어른들 이야기에 의하면 절에 있던 스님들이 먹고 살았던 물이며,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산 소유주는 현재도 이 샘을 집과 연결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세룡리 절터에는 밤나무가 곳곳에 심겨 있고, 산 소유주 집안 묘가 3기 조성되어 있다. 묘 주변부에서 명문 기와 조각이 다수 확인되었고, 이 중 명문이 있는 귀면(鬼面) 무늬 암막새 조각과 연꽃무늬 수막새 조각이 확인되었다. 세룡리 절터 동북쪽 묘 근처에서는 파괴된 석탑 석재들이 반쯤 묻혀 있는 상태로 주변에 방치되어 있다. 
동북쪽에는 높이 2미터, 폭 8미터 정도 되는 암벽에 마애삼존불(磨崖石佛)이 조각되어 있다. 마애삼존불은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말하며, 마애석불ㆍ마애불ㆍ벼랑부처로도 불린다. 세룡리 마애삼존불은 현재는 거의 마멸되어 그 흔적만 알아볼 수 있는 정도다. 
 

▲마애삼존불.
▲세룡리 절터 석탑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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