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 전봉준관 표지석 문구 ‘바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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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전봉준관 표지석 문구 ‘바꿔’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2.1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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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감 조성 논란 있던 ‘김경천 밀고’ 대신 ‘절명시 운명(殞命)’으로 교체
황군수, 쌍치 피노리 일대 토털 역사교육장소로 조성 구상 밝혀

쌍치면 피노리에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관 피체지 표지석은 그동안 밀고자 김경천이 정읍 출신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곳은 정읍 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동학혁명가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곳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 장군이 정읍 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된 곳입니다”로 문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었다. 
황숙주 군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전봉준관 표지석 관련 생각을 밝혔다. 

▲녹두장군 전봉준관 표지석 문안 교체 전(좌)과 후(우).

■ 황군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소개한다.
황숙주 군수 페이스북 게시글
12월 8일

“고부군수 조병갑은 민보(民洑)를 축조한다는 명분으로 농민들을 강제 동원했으며, 부당한 수세를 징수해 700여 석을 가로챘고, 자기 아버지를 위한 비각을 건립한다는 명목으로 농민들로부터 1000여 냥을 거두었으며, 대동미를 좋은 쌀로 거두고 나쁜 쌀로 상납해 이익을 착복했을 뿐만 아니라 불효ㆍ불목ㆍ음행ㆍ잡기 등의 죄목으로 농민들의 재물을 빼앗았다.” 
“지금 나라는 외세 일본군이 침탈하고, 위정자는 백성을 돌보지 않고 수탈만 일삼으니 백성은 도탄에 빠졌도다. 장차 나라와 창생들이 위기이도다. 사람이 하늘인 세상, 보국안민, 광제창생, 척양척왜, 제폭구민의 깃발 아래 이 한목숨 두려울 게 없도다. 동학농민군이여, 정의로운 세상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해 진군하자. 나를 따르라.” 
궁을부는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13자를 쓴 종이 쪽지로, 본주(本呪)라 합니다. 이 글귀 뜻은 한울님을 모시면 조화가 이뤄진다는 주문이나 원망의 궁을부 일뿐입니다 
동학농민군은 궁을부를 외면 총알도 피해간다는 말을 믿고 주문을 외우면서 진군을 거듭하여 공주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무라다 소총으로 무장한 모리야(森尾雅一)의 일본군과 대치하게 됩니다. 
일본군의 무라다 소총은 전설의 영국제 소총인 스나이더 소총을 자신들의 신체에 맞게 개선한 소총으로서, 우리는 여전히 화승총 몇 자루를 들었을 뿐입니다. 무라다 소총은 엎드린 자세에서 장전하며 1분간 15발을 쏠 수 있었고 사거리는 800미터(m)인 반면에, 화승총은 2~3분 동안 선 채로 1발을 장전해 쏠 수 있었고 사거리는 120m였는데, 이런 화승총에 죽창, 그리고 홑 흰옷을 입고 대결한 것입니다. 
갑오년 11월 추운 겨울이고 아무리 큰 결기로 뭉쳤다 하더라도 더구나 흰옷을 입은 터라 일본군의 피할 수 없는 표적이 되어 3만여 농민군은 무라다 소총에 하염없이 당해 지금도 우금치 밭갈이를 하면 당시 산화한 농민군의 뼛조각이 나온답니다. 
그 전에, 녹두장군 전봉준은 공주성 공격을 앞두고 점을 치니 계룡산과 경천을 조심하라는 괘가 나왔답니다. 계룡산 서편 기슭을 지나다 보니 실제로 경천이 있었습니다. 논산과 경계를 맞댄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 그 이름에 놀라 녹두장군은 가슴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였습니다. 허나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성능 좋은 무라다 소총 때문에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남으로 후퇴를 하면서도 계속 패하면서 쫓겼습니다. 
전투에서 패한 전봉준은 부하 셋만 대동한 채 관군과 일본군의 추적을 받으며 입암산성을 거쳐 청수장에서 또다시 밀리는 도피길에 있는 동안, 조정에선 전봉준 목에 거금 1000냥과 군수 자리를 내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일을 도모하고자 태인 남녘에 숨어 있던 혁명 동지 김개남을 찾아가던 중 우리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서 옛 친구이자 부하였던 ‘김경천’을 만납니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길가 주막으로 안내하여 저녁밥을 시키고 안심시킨 후 곧바로 이웃에 몰래 알리면서 녹두장군은 허망하게 체포되고 맙니다. 갑오년(1894년) 그해 음력 섣달 초이틀 차디찬 날씨, 뜨거운 국밥 한 그릇 제대로 비우지 못한 채였습니다. 
그런데, 이곳 ‘피노리 뒷산’이 바로 ‘계룡산’ 이었고 밀고자가 곧 ‘경천’이었으니. 결국 전봉준은 계룡산과 경천의 그 고비를 넘지 못하고 스러졌고 혁명의 불길도 기약 없이 꺼져버렸습니다. 
이곳 순창 곳곳의 수많은 농민이 몰려나와 통곡하며 영웅의 마지막 길을 전송하였고, 지금도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녹두장군의 그 형형(炯炯)한 눈빛을(특히, 순창사람들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잡혀가는 녹두장군은 순창 쌍치 피노리의 ‘계룡산’과 ‘경천’이 얼마나 원망스러워 했겠습니까? 
1895년 3월 29일 전봉준을 비롯해 손화중ㆍ최경선ㆍ성두한ㆍ김덕명 등이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일본 영사관에 구금됐을 때 몇몇 일본인이 찾아와 회유했답니다. 
“그대의 죄는 일본 법률로 따지만 국사범이다. 그러나 사형까지는 이르지 않을 수도 있다. 마땅히 일본인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재판해보라. 일본 정부의 양해 아래 살길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전봉준은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다른 말 할 것 없다. 그러나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리라. 어찌 이 깜깜한 적굴에서 암연히 죽이느냐” 했답니다. 그리고 광화문광장에서 효수(효시)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봉준은 즉흥시 
‘운명(殞命)’을 읊었습니다. 

時來天地皆同力  때가 오매 천지가 모두 힘을 합했는데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르겠구나.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겠느냐만, 
爲國丹心誰有知  나라 위한 오직 한 마음 그 누가 알겠는가? 
 
순창군수로서 유감을 표명합니다! 
위와 같이 애국충정으로 정의를 세우려 한 비운의 영웅이신데 그동안 이곳 순창에서는 역사적 인식이 xx하여 “그 경천은 순창사람이 아니다” 하는 몽매한 입장을 앞세워 ‘녹두장군 전봉준관’ 표지석에 “이곳은 정읍 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동학혁명가 전봉준이 체포된 곳입니다”라고 쓴 표지석이 세워졌던 것에 심심한 유감을 표시하며, 표지석 문구를 위 녹두장군의 절명시 운명(殞命)으로 교체했음을 신고 말씀 드립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12월 10일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 녹두장군 전봉준관의 ‘표지석 문안’의 유감에 대해서는 엊그제 일부 소개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녹두장군은 체포된 당시 몽둥이 등의 가혹행위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몸과 다리에 많은 상처를 입은 채 피노리에서(지금은 오솔길 흔적만 있는) 신광사 재를 넘어 순창군 구림 연산으로 압송됩니다.
순창사람으로서 저는 이곳을 성지로 생각하여 ‘녹두장군 전봉준관’만으로는 고난의 시대에 앞장선 선구자시며 근대 우리 국민정신을 일깨우신 훌륭하신 지도자를 기리고 추모하며. 교훈으로 삼는 전당으로서는 한참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령 웹툰ㆍ미술ㆍ연극이나 뮤지컬 공연 소재로는 안중근 의사나 전봉준 장군같이 좋은 교육재료가 어디 있느냐 하면서 이 지역 일대를 역사교육의 장소로 만들어 그분이 생각하고 행동으로 앞장섰던 시대를 우리 국민과 학생들이 탐방하고 체험과 공연을 하는 토털 역사 교육장소로 조성하려는 구상을 지속하여 왔습니다.
마침 2015년 7월 전북도의 ‘전북형 농촌관광거점 마을육성사업’ 공모에 피노리의 역사탐방 및 체험실습 교육사업이 선정되어 군비 포함 32억 원을 들여 거점센타(교육ㆍ회의ㆍ식사ㆍ숙박)와 써바이벌장(체험ㆍ놀이) 등을 갖추어 ‘총뎅이(포수의 옛 이름)마을’이란 명판을 걸고 작년 말 뮤지컬 〈아! 안중근 열사!〉 공연과 함께 개장식을 거행하고 성황리에 운영 중에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녹두장군이 끌려간 '총뎅이'로부터 신광사 재까지 압송로를, 야외공연도 가능한 역사탐방 테마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군비 5억 원을 들여 정비 중에 있어 내년 초에는 통행 가능할 예정입니다.
신광사재 압송로가 정비되고 ‘녹두장군 전봉준 역사관’과 체험숙박장인 ‘총뎅이마을’ 그리고 10억 원을 들이게 되는 ‘피노리 아름다운 주거공간’ 마을 개선사업에 ‘경천’이 밀고한 막걸리집까지 재현되면 명실공히 녹두장군이 잡혀간 곳 피노리가 성소가 되어 자라나는 청소년 학생들에게 정말 좋은 역사 탐방지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광사 재에는 6ㆍ25 전쟁 당시 정부군과 빨치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라희봉 고지가 있는데 당시 순창경찰서 쌍치지서장으로 부임했던 라희봉 경감이 1952년 빨치산과의 전투 중 중상을 입고 전사했고 많은 순경과 민간인도 전사한 ‘라희봉고지’가 있어 이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압송되는 전봉준 장군의 당당한 모습.
▲전봉준 압송로.
▲전봉준 압송로 역사테마공간 개발사업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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