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18) 적성면 괴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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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18) 적성면 괴정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2.2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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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정리는 적성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북쪽으로 오수천이 흘러 동계면 서호리와 구분 짓고, 동쪽으로는 채계산이 남원시 대강면과 경계를 이룬다. 남쪽은 적성면 고원리와 인접하고, 서쪽은 적성면 평남리와 갈라져 있다. 

▲괴정마을.
▲마계마을.
▲서림마을.
▲신월마을.

마을 유래와 현황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회쟁이마을, 서림마을, 마계마을을 통합해 괴정리라고 개칭했고, 1935년 남원군에서 순창군 적성면으로 편입되었다. 1977년 취락구조개선사업으로 새 마을이 만들어지자 신월마을이라 하고 괴정리에 편입시켜 4개 행정마을이 되었다. 
괴정리는 마을 서쪽에 수백 년 된 회화나무가 있어 회쟁이로 부르다가 지금은 ‘회화나무 괴(槐)’ 자를 써서 괴정리(槐亭里)라고 부른다. 서림마을은 물소가 풀을 바라보는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이고, 마계마을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渴馬飮水ㆍ갈마음수) 형상이라 ‘마계’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신월마을은 새로 형성된 마을 지형이 마치 반달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괴정리는 채계산을 제외하고 평야지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섬진강과 오수천을 끼고 있어 농경지가 넓고 비옥해 주로 논농사를 짓는다. 국도 24호선과 13호선이 통과하는 등 교통이 편리하다. 2020년 12월 21일 현재 괴정리 인구는 121가구, 218(남자 120, 여자가 98)명이다. 

반선정

'신선과 짝한다'는 의미의 반선정(伴仙亭)은 괴정리 적성강 변 채계산 아래 중연 위에 있던 조선 전기 누정이다. 1766년(영조42) 이후 편찬된 《순창군읍지》에 이미 사라졌음을 알리고 있다.
누정 주인 반선(伴仙) 양공말(楊公抹ㆍ1502~1560)은 임실군 삼계면 아산리 출신으로, 말년에 아름다운 산수를 조감할 수 있는 채계산 기슭 적성강 변으로 이주해 학문을 강구하며 당대 명사들과 교우하며 풍류를 즐겼다. 당시 김인후ㆍ소세양ㆍ임억령 등 명사(名士)들의 시가 반선정(伴仙亭)에 걸려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권집 유허비.

권집 유허비

권집 유허비는 적성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국도 24호선을 타고 가다 괴정 삼거리에서 우측 산길로 10킬로미터쯤 가면 나오는 서림마을 어귀에 있다. 
일반적인 비신(碑身)과 개석(蓋石)을 갖춘 형태이지만 상당히 큰 편이다. 석질은 바다 돌을 사용했는데, 그 속에 금이 박혀 있다는 풍문이 돌아 사람들이 몰래 금을 채취하느라 비석을 훼손하기도 했다. 비의 전면에는 해서로 ‘극복재 화산 선생 권공 유허비(克復齋華山先生權公遺墟碑)’라 쓰여 있고, 음기(陰記)에는 작은 글씨로 권집의 내력이 적혀 있다. 
권집(權潗ㆍ1665~1716)은 조선 후기의 학자다. 본관은 안동, 자는 수옥(壽玉), 호는 화산(華山)이다. 경상도 안음(현재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서 순창 적성으로 이거해 화산 아래에서 생활했으므로 화산이란 호를 짓게 되었다. 
권집이 살았던 숙종(재위 1675~1720) 대에 당파 싸움이 계속되어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이에 권집은 산간에 묻혀 살며 제자들에게도 “오늘 같은 세상을 살면서는 당론에 가담해 소장(疏章ㆍ상소문)을 올린다거나 하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1701년(숙종 27)에 사약을 받고 죽은 희빈 장씨의 아들(훗날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 또 한 번 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권집은 당호(堂號)를 극복재(克復齋)라 했는데, 이는 공자가 역설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욕심을 버리고 사람이 본래 지녀야 할 예의와 범절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저서로 《화산유고》(華山遺稿)가 전한다. 
권집은 효성이 매우 지극했다고 전한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감과 젓갈을 무척이나 먹고 싶어 했는데, 의원이 해롭다고 하자 어머니께 드리지 않고 자신도 평생 어머니를 생각하며 감과 젓갈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시묘를 하는 3년 동안에 묘소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고, 풍우와 한설을 이겨 내며 무릎을 꿇고 통곡하니 자리가 깊이 파여 풀이 돋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제자들이 권집의 효성을 기리고자 1753년(영조 29) 마을 어귀에 권집 유허비(權潗遺墟碑)를 세웠다. 

▲일광사.
▲일광사 관음보살 좌상.

일광사

일광사(日光寺)는 적성강 큰다리 위쪽 채계산 중턱, 경치가 아름다운 숲속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1948년 10월 보살 오월명화(吳月明華)와 승려 김세현(金世鉉)이 작은 인법당을 창건하고 부처를 모시고 수도한 곳이다. 그 후 김세현의 상좌(上佐)인 길용(吉龍)이 1965년부터 은사의 유지를 받들어 절을 운영해 오면서 삼성각과 관음전을 짓고 요사채를 건립했다. 
일광사 뒤쪽 채계산 중턱에 오래전부터 암굴이 하나 있는데 옛날부터 수도승들과 학자들이 암굴에서 깊은 수련을 하거나 공부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도 승려들이 수련을 하는 곳이다. 
일광사 삼성각에 있는 관음보살 좌상은 조선 후기 것으로, 나무로 조각되었다. 앉은 높이가 47센티미터(㎝), 무릎 폭이 28.5㎝다. 2014년 10월 31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괴정마을 수미륵, 신월마을 암미륵.

수미륵과 암미륵

괴정마을 수미륵과 신월마을 암미륵은 남원과 순창을 연결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두 석인상은 수구막이 선돌형 미륵불 형상이다. 
괴정마을 수미륵은 판석(납작하고 편평한 암석)형 입석 미륵불로, 불상 형식을 갖추지 않은 입석상이다. 크기는 128센티미터(㎝), 폭은 45㎝로서 채계산에서 채석한 돌을 임시 가공해 세워 놓은 것으로 보인다. 신월마을 암미륵은 독집이라는 미륵 당집 안에 있었으며, 마모는 심할지언정 불상 형식을 갖추었다.

▲괴정리 회화나무.

괴정리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예부터 모든 나무 가운데서 으뜸으로 치는 신목(神木)이며, 길상목(吉祥木)으로 손꼽아왔다.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학자나 큰 인물이 나며, 잡신이 침범하지 못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모여든다 하여 많이 심었다. 하지만 아무 곳이나 함부로 심지는 않았다. 
괴정리 회화나무는 수령 약 310년으로 높이 11미터, 수관 폭 12미터다. ‘괴정’이란 마을 이름이 마을 가운데에 있는 회화나무에서 생겨났다. 처음에 회화나무가 있어 ‘회쟁이’로 부르다가 이후 ‘회화나무 괴(槐)’ 자를 써서 괴정리(槐亭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1970년 중반까지만 해도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에 밥을 차려 놓고 마을 주민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제물을 준비했는데 마을에서 2~3개월 전에 추천된 사람만이 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때는 부부 사이도 멀리하고 사흘 동안 목욕하며 밥도 먹지 않았고 제사를 지낼 옷을 갖추고는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1995년 태풍 페이와 1999년 태풍 올가 때 나무가 부러지는 피해를 입었지만 재난 조치 후 지금은 새 가지가 뻗어 아름드리나무 그늘을 만들고 있다. 
나무 주변에 빙 둘러 나무 의자가 만들어져 마을 주민들이 쉼터로 활용하고 있다. 나무에 대해 설명한 철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2005년 7월 1일 보호수 제9-12-68호로 지정되었다. 

 

▲괴정리 느티나무.

괴정리 느티나무

괴정리 느티나무는 순창에서 남원 방향으로 가다 나오는 동계면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동계 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있던 주점에서 괴정과 동계 주민들이 남원과 순창읍을 오갈 때 막걸리도 한 잔하면서 서로 안부를 전하고 소식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현재 주막은 없어졌고, 도로가 나면서 느티나무도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마을 주민들이 반대해 직선이 아닌 구부러진 도로가 만들어졌고 나무를 보호수(제9-12-4-4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지금도 괴정리 느티나무는 마을 주민들의 쉼터 구실을 하고 있다. 

▲화산옹.

화산옹의 신비

채계산(화산) 아래 적성강변에 거대한 흰 바위가 서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백발노인이 우뚝 서 있는 모습 같다 하여 사람들은 이 바위를 '화산옹(화산의 늙은이)'이라 불렀다. 화산옹은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화산옹 색깔이 희고 맑게 보이는 해에는 풍년이 들었고, 검은색을 띄면 흉년이 들었다. 또한 큰 불이 난다거나 전염병이 도는 해에는 파란색으로 변했고, 전쟁이 나거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는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화산옹 앞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아이를 갖지 못한 아낙들은 그 앞에서 치성을 드렸다. 또한 화산옹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공손하게 경의를 표하고 지났고,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말에서 내려 공손히 절을 하고 지나갔다. 이것은 화산옹이 영험한 바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전라병사 김 모가 수십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화산옹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를 수행하는 한 병졸이 화산옹의 영험함에 대해 자초지종 말하고는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출 것을 권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전라병사는 천하의 명장이 한낱 바위에 예를 갖추기 위해 말에서 내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며 그대로 말을 타고 유유히 지나갔다. 그런데 몇 발짝 가지도 못해서 잘 가던 말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러자 전라병사는 요망한 바위덩이가 장부의 기개를 꺽는다며 한바탕 호령을 하고는 칼로 화산옹의 목을 치자 화산옹의 목에서 피가 흘렀고, 그 목은 데굴데굴 굴러서 적성강 물속으로 깊이 잠겨버리고 말았다. 그 후 화산옹의 영험은 사라지고 천재지변과 괴변이 연이어 일어나고, 적성현도 폐현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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