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원 씨, 틈 날 때마다 읽고 쓰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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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원 씨, 틈 날 때마다 읽고 쓰는 농부,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2.23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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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부터 구슬땀 흘리며 살아온 주민들의 ‘인생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열린순창》기자나 시민기자가 지역 주민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를 받아 적습니다. 삶의 애환이 담긴 사진과 함께 한 편씩 펼쳐집니다.
지역 주민의 일생은 개인사이기도 하지만 동네 역사이자 현대사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야기’ 대상은
성공했거나 잘나가는 사람만은 아닙니다. 군민 누구나 대상입니다. ‘인생이야기’에 여러분의 참여를 기대합니다.
추천해주시고 써주시면 정성 들여 보기 좋고 튼실하게 알리겠습니다. (편집자)

-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원래 해방동인데 호적은 1946년으로 돼 있어요. 2남2녀 중 장남이고요. 위로 누님이 둘, 남동생 하나가 있습니다. 아버지 연세 57세 때, 어머니 42세 때 저를 낳으셨대요. 남아를 선호하던 시대에 부모님 연세도 많으실 때 출산해 주위에서 축하를 많이 받으셨대요. 

- 엄청 귀하게 자라셨겠네요.
가난한 집안이지만 장손이어서 대우받았죠. 누나들과 동생은 나한테 잘못하면 부모님께 혼났어요. 제가 어렸을 때 몸이 많이 약했어요. 6살 때부터 수시로 경풍이 일어나 부모님 마음고생 많으셨죠. 13살 때까지 3∼4일 간격으로 발작이 일어났어요. 동리 분 말씀에 의하면 부모님은 칼을 몸에 품고 다니셨대요. 혹시 내가 죽으면 따라 죽으려고.

- 어렸을 때 얘기 궁금합니다.
8살 때 4살 위인 작은 누나와 같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건강 때문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학교에서는 왕따였어요. 그러다 집에 오면 왕 노릇하고, 왜 그랬는지 유독 작은 누나에게 행패를 부렸어요. 
건강 문제로 소풍도 자주 못 갔는데 큰 매형 덕분에 정읍 칠보발전소로 수학여행은 가게 됐어요. 도로는 구부구불 비포장 자갈길 차가 달릴 때 학생들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그래도 신이 나서 “노령에 빚은 햇살 금 만경 넓은 들”(<전북의 노래>), 교가인 “화산에 붉은 햇님” 등 여러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고 집에서 열심히 가사를 도왔어요. 당시는 비료가 귀해서 풀 베어 퇴비 만들어 논에다 깔기도 하고, 나무로 불을 때서 음식도 해 먹고 방에 불도 때야 하니까 십 리나 되는 먼 산까지 나무하러 다녔어요. 

- 지금은 건강해 보이는데, 언제 완쾌되셨나요?
20대 초반까지도 아팠어요. 1960년에 아버지께서 향년 70세로 별세하셔서 내 나이 15세 때 소년 가장이 됐어요. 풀 베고 나무하면서도 공부하고 싶어 재건학교와 서당도 몇 달 다니다가 마음의 병 때문에 8년 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방에 누워만 있었어요. 어머니와 누님이 앉혀주면 그대로 멍하니 있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병원에 갈 형편이 안 돼서 그럭저럭 보냈는데 어느 날 동리 모 분 댁에 점보는 분이 왔어요. 어머니도 가셨는데, 굿을 하라고 해서 했는데 점차 차도가 있어 기적적으로 8년 만에 회복됐어요. 조상님들과 가족, 동리 분들의 은덕으로 회복된 것 같아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 정말 다행이었네요.
몸이 회복되자 어머니는 결혼을 서둘렀어요. 중매로 유등 화탄에 살던 고령신씨 신기순 규수와 결혼했습니다. 안사람은 11남매 중 장녀예요. 저를 만나서 고생만 했지라.
- 결혼 후에는 농사짓고 사셨나요?
그렇죠. 그리고 농한기에는 아카시아 잎과 약초 채취하고 바작, 산태미(삼태기)를 만들었어요. 바작은 지게 위에 얹어 짐을 나르는 거고, 산태미는 흙이나 거름 따위를 담아 나르는 기구예요. 지금은 생산되지 않지만 농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옛날에 대산리는 산간오지 마을로 농토는 한정되어 있고 농사밖에 몰라 가난하게 살았어요. 1952년경 유천수라는 분이 대산리로 이사 와서 바작과 산태미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을 보고 배워 동네 사람들이 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도 마을 어른에게 전수받았죠. 재료 구하러 새벽에 일어나 십 리, 이십 리나 되는 산까지 가서 싸리나무 베어 지게에 지고 집에 도착하면 밤 8∼9시가 되었죠. 시간 나는 대로 엮어 만들어서 새벽 4∼5시에 출발해 등에 메고 20리 길을 걸어 순창시장 도매집에 주면 아침밥을 주는데 그 맛이 꿀맛이었죠. 

- 서울에서도 사셨나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3년상 마치고 46세 되던 해 봄에 아내가 간곡하게 권유해서 서울신월3동으로 이사했습니다. 어머님 생각하면 항상 눈물이 나요. 13세에 가난한 장손집 큰며느리로 시집 오셔서 4남매를 잘 키우셨는데 나 때문에 유독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죠. 늦게나마 손주들 키우는 재미로 사시다 향년 82세로 돌아가셨어요. 옛날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집안 조용한 곳에 혼백상자를 모셔놓고 아침저녁으로 밥상을 차려 곡하고 두 번 절했어요. 3년 동안 하는 이런 의식을 3년 상이라 하재라.

- 서울 생활 소개해 주세요?
힘들지만 일당이 높은 노동일을 했어요. 1층부터 5층까지 시멘트, 모래, 자갈, 타일, 벽돌 등을 지고 옮겼어요, 안식구는 건물 청소 일을 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우니까 온 가족이 열심히 노력하고 근검 절약해서 신월3동에 단독주택 2채 사서 큰아들, 작은아들에게 한 채씩 주었죠. 물론 아들들도 돈을 보탰지만.
육십 넘으니까 공사 현장에서 안 받아주더라구요. 집에만 있으니까 우울하고 세상 살기가 싫어졌습니다. 안식구 권유로 병원에 가서 진찰 결과 우울증과 조울증(정신이 흥분된 상태와 우울한 상태가 교대로 나타나거나 둘 가운데 한쪽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병) 진단을 받았어요. 평생 약을 복용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서울생활 20년 동안 15년은 근검 절약, 열심히 노력하고, 5년은 우울증과 조울증으로 고생하다 서울생활 청산하고 귀향했죠. 한 30년 서울생활하려 했는데 조금 빠른 귀향이었죠. 

- 귀향 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귀향해서 26평 벽돌 슬라브집을 지었어요. 논 3000평, 두릅 500평, 블루베리 300평 경작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동리 분들이 추천해 새마을지도자 5년, 이장 일도 2년 했습니다.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도 참석했고 군수님 표창도 받아봤어요.
가난한 삶이었지만 근면 절약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해 봅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 사랑하는 아내와 내가 태어난 고향 대산리에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정직하게 땅을 일구며 살고 싶습니다. 아들 딸, 손주가 서로 아끼며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좋은 책 많이 읽으면서 살고 싶습니다.

정동원 씨는 슬하에 3남매를 두었고, 손자 손녀가 여섯이다. 아직도 조울증 증세가 있지만 마음이 안정되면 신문, 잡지, 책 등을 보고 좋은 글은 메모해 둔단다. 아내와 농사지으면서도 시간 날 때마다 연습장에 시, 신변잡기 수필 등 글 쓰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그렇게 해서 《삶에 도움글》과 《나의 별난 삶》 책 두 권을 엮기도 했다. 《나의 별난 삶》을 발간하고 난 올 3월 대산마을 입구에 사비로 마을 표지석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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