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원화훼잡설〉은 어떤 내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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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원화훼잡설〉은 어떤 내용인가?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12.23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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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꽃나무에 대한 기록
▲순창요양병원 뒤에 있는 순원 터(원 안에 연못과 섬 3개가 있다.)

꽃에 대한 설명과 고증, 단상
순창읍 남산마을에 있는 누정 귀래정(歸來亭)을 세운 사람은 신말주(申末舟)였지만 후손 중 출세한 인사 대부분은 대대로 한양에서 생활했다. 귀래정에는 어쩌다 들렀을 뿐이다. 그 후 8대가 지나 신선영(申善泳)이라는 사람이 고향으로 내려와 귀래정에 다시 살게 되었다. 동쪽 바위 언덕에 새로운 누정을 짓고 못을 팠으며, 못 안에 섬 셋을 두었다. 또 여러 기이한 바위를 모으고 온갖 꽃을 구해 심었다. 이를 순창의 정원, 순원(淳園)이라 했다.
그 손자가 순원을 물려받아 그곳에서 살았다. 바로 18세기 대표 실학자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ㆍ1712∼1781)이다. 그 역시 학업과 벼슬로 인해 자주 고향을 비웠지만, 조부가 조성한 정원의 꽃나무를 사랑해 여러 꽃의 특성을 간단하게 설명한 후 그에 대한 고증을 겸해 단상(斷想ㆍ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을 붙였다. 그 기록이 바로 《여암유고》(旅菴遺稿)에 실린 〈순원화훼잡설〉(淳園花卉雜說)이다.
순원에는 연꽃과 난초ㆍ매화ㆍ국화ㆍ철쭉ㆍ앵두ㆍ모란ㆍ작약ㆍ대나무ㆍ백일홍 등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는 수많은 종류의 꽃이 있었고, 조밥나무(常山)ㆍ사계화(四季花) 등 이름이 생소한 꽃도 있었으며, 목가(木茄)ㆍ명사(榠樝)ㆍ면래(眠來)ㆍ어상(禦霜)처럼 어떤 꽃인지 알 수조차 없는 33종의 꽃이 기록돼 있다. 이조차 신경준이 보았던 꽃의 10%에 지나지 않는다 하니, 당시 순창에 얼마나 많은 꽃이 피었는지 짐작이 간다. 

백일홍과 국화에 대한 단상
꽃이 귀한 여름 한 철 붉은 꽃을 연달아 피어 올리는 배롱나무는 꽃이 백일 동안 붉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도 하고, 한자로는 자미화(紫薇花)라고도 한다. 신경준은 〈순원화훼잡설〉에서 자미화를 ‘절도 있는 꽃’으로 예찬했다. “자미화는 먼저 핀 꽃이 지려 할 때 그 뒤의 꽃이 이어서 피어난다. 많고 많은 꽃잎을 가지고 하루하루의 공을 나누었으니 어찌 쉽게 다함이 있겠는가? 아마 절도의 의미를 터득함이 있는 듯하다.” 
도연명이 ‘음주(飮酒)’에서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꽃 따다가 / 유연하게 남쪽을 바라본다”라고 읊은 이후 국화는 군자의 은일(隱逸)과 지조를 상징하는 꽃이 되었고, 서리와 추위에도 굴하지 않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꽃이 되었다. 신경준은 다른 말을 했다. 〈순원화훼잡설〉에서 “내가 보기에 국화는 사양하는 정신에 가깝다. 봄과 여름에 온갖 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다투지만 (중략) 국화는 입 다물고 물러나 있다가 여러 꽃이 마음을 다한 후에 홀로 피어 풍상에 꺾이는 것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으니 양보하는 정신에 가깝지 아니한가.”

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글, 〈이름 모를 꽃〉
〈순원화훼잡설〉에 실린 내용 중 특히 주목받는 대목은 ‘이름 모를 꽃’(無名花)에 대한 설명이다. 흔히 ‘학문은 사물의 이름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우리는 정원이나 교외에 피어 있는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경준은 이름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름을 모른다 해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꽃이라면, 그것대로 감상하자는 여암의 선언은 꽃 이름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 다음은 고교 국어 교과서(신사고 발행)에도 실린 
<이름 모를 꽃> 전문이다. 

순원(淳園)의 꽃 중에 이름이 없는 것이 많다. 대개 사물은 스스로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사람이 그 이름을 붙인다. 꽃이 이미 이름이 없다면 내가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또 어찌 꼭 이름을 붙여야만 하겠는가?
사람이 사물을 대함에 그 이름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것은 이름 너머에 있다. 사람이 음식을 좋아하지만 어찌 음식 이름 때문에 좋아하겠는가? 사람이 옷을 좋아하지만 어찌 옷 이름 때문에 좋아하겠는가? 여기에 맛난 회와 구이가 있으니 그저 먹어보기만 하면 된다. 먹어 배가 부르면 그뿐 무슨 생선의 살인지 모른다 하여 문제가 있겠는가? 여기 가죽옷이 있으니 입어보기만 하면 된다. 입어보고 따뜻하면 그뿐 무슨 짐승의 가죽인지 모른다 하여 문제가 있겠는가? 내게 꽃이 있는데 좋아할 만한 것을 구했다면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하여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이름이란 구별 짓기 위한 것이다. (중략)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면 대소장단의 크기, 청황적백의 색깔, 동서남북의 방위 등 어느 것 하나 이름 아닌 게 없다. 가까이 있으면 ‘여기’라 하는데 이 역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멀리 있으면 ‘저기’라고 하는데 그 또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름이 없어서 ‘무명(無名)’이라 한다면 ‘무명’ 역시 이름인 것이다. 어찌 다시 이름을 지어다 붙여서 아름답게 치장하려고 하겠는가?
예전 초나라에 어부가 있었는데 초나라 사람이 그를 사랑해 사당을 짓고 대부 굴원(屈原)과 함께 배향했다. 대부 굴원은 《초사》(楚辭)를 지어 스스로 제 이름을 찬양해 정칙(正則)이니 영균(靈均)이니 했으니, 이로서 대부 굴원의 이름이 정말 아름답게 되었다. 그러나 어부는 이름이 없고 단지 고기 잡는 사람이라 어부라고만 했으니 이는 천한 명칭이다. 그런데도 대부 굴원의 이름과 나란히 먼 후세까지 전해지게 되었으니, 어찌 그 이름 때문이겠는가? 이름은 아름답게 붙이는 것이 좋겠지만 천하게 붙여도 무방하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아름답게 해주어도 되고 천하게 해주어도 된다. 아름다워도 되고 천해도 된다면 꼭 아름다움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면 없는 것이 정말 좋을 것이다.
어떤 이가 말했다. “꽃은 애초에 이름이 없었던 적이 없는데 당신이 유독 모른다고 하여 이름이 없다고 하면 되겠는가?” 
내가 말했다. “없어서 없는 것도 없는 것이요, 몰라서 없는 것 역시 없는 것이다. 어부가 또한 평소 이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요, 어부가 초나라 사람이니 초나라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초나라 사람들이 어부에 대해 그 좋아함이 이름에 있지 않았기에 그 좋아할 만한 것만 전하고 그 이름은 전하지 않은 것이다. 이름을 정말 알고 있는데도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는데, 하물며 모르는 것에 꼭 이름을 붙이려고 할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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