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38)/ 병영·2-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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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분다(38)/ 병영·2-자대
  • 선산곡
  • 승인 2020.12.3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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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병소를 지키는 상병 계급장을 단 헌병이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갓 훈련을 마친 신병을 바라보는 시선에 묘한 득의가 서려 있었다. 예닐곱의 구급차가 줄지어 선 수송부대를 지나자 껄렁 병장이 손짓을 하며 멈추어 섰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여기가 우리 부대라는 뜻이었다. 그가 가리킨 하얀 간판에 ‘5706부대’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강원도 첩첩산중으로 배치될 것을 예상했던 나로서는 앞으로 3년간 근무할 부대가 원주시 외곽이었던 게 뜻밖이었다. 아스팔트가 깔린 길옆으로 꼬불거리는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길 건너 단층으로 된 병동 건물 잔디밭에 환자복을 입은 군인들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야시소는 51후송병원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 따로 독립된 의무부대라고 껄렁 병장은 친절한 척 이야기했지만 그런 부대구조가 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보급, 수송, 병원, 실험, 방역 등 업무들은 달라도 의무(醫務)에 관련된 부대들만 통합되어 모여 있는 곳이었음은 나중에 안 일이었다. 
그 부대 간판 옆에 전쟁영화에서나 봤음 직한 퀀셋 막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길쭉한 반원형의 기둥 없는 건물은 깡통 절반을 수평으로 잘라서 땅 위에 엎어놓은 모양이었다. 주름진 양철건물 전체에 작은 창문을 제외하고 검은 콜타르가 칠해져 있었다. 병장이 나를 데려다 놓은 곳은 내무반이었다. 내 임무는 끝났다는 듯 껄렁 병장이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는 혼자 내무반 구석에 앉아 있었다. 뒤편 작은 연병장에서 병사들이 배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축구장 넓이만 한 연병장을 상상했던 나로서는 부대의 규모가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는 것에 조금 실망하고 있었다. 거기다 내무반은 1개 소대 병력이 겨우 쓸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평수였다. 시간이 지나자 병사들이 땀을 흘리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배구경기가 끝난 모양이었다. 모두 다 신병 전입을 미리 아는 눈치였다. 부산히 옷을 갈아입는 그들 틈에서 유난히 눈빛이 반짝거리는 병장이 윗도리 단추를 끼우면서 내게 고향을 물었다. 
“전라도 따불빽이여?”
내 대답을 듣자마자 그가 빈정거리듯 하는 말이었다. 전라도 말을 흉내 내는 그의 억양이 경상도라는 것은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볼우물이 유난히 깊게 들어가는 미남이었지만 그 눈빛이 차가운 독기를 품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라도가 고향인 나를 반기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는 나를 상병 하나가 따라오라고 했다. 고개를 숙인 채 사람을 흘기듯 바라보는 상병의 첫인상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도 저런 피부가 있나 할 정도로 뽀얀 얼굴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를 따라 들어간 곳은 맨 처음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퀀셋 막사였다. 어둑한 실내등 빛에 굵은 테 안경을 쓴 병장이 책상에 앉아 타이프라이터를 치고 있었다. 타이프라이터는 책상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고 묵직해 보였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는 부챗살 같은 문자발이 종이를 때리고 돌아가며 내는 소리가 타닥탁, 퀀셋막사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흘러내린 안경테를 오른손으로 밀어 올리는 버릇이 있는지 이따금 타이핑을 하다말고 병장은 그 손짓을 반복했다. 상병이 가버린 뒤 타이프라이터 롤러를 굴려 종이를 빼낸 병장이 나를 찬찬히 훑어보며 신상을 묻기 시작했다. 이윽고 종이 한 장을 내 앞으로 밀어놓더니 주소를 써보라고 했다. 딱. 책상 위로 볼펜 놓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전라북도 순창군, 천천히 고향집 주소를 썼다. 종이를 집어 든 병장이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됐어.” 짧은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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