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20) 풍산 반월리 - 풍산면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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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20) 풍산 반월리 - 풍산면 소재지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1.2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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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리(半月里)는 풍산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명동, 월산리, 보내리, 이목동, 하죽리 각 일부를 병합해서 반월리라 했다. 서쪽부터 월명마을, 월산마을, 매산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용내리와 죽전리, 서쪽은 금과면 수양리, 남쪽은 유정리, 북쪽은 죽곡리가 인접해 있다. 2021년 1월 1일 현재 반월리 인구는 91가구, 173명으로 남자가 91명, 여자가 82명이다. 

▲월명마을 전경.
▲월산마을 전경.

풍산면 소재지

풍산면 중심지로 풍산면사무소, 풍산초등학교, 다목적체육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풍산초등학교는 1932년에 개교했고, 올 2월이면 85회 졸업생을 배출한다. 2019년 11월에 문을 연 다목적체육관은 지상 1층 규모로, 배드민턴 3코트와 배구 1코트 등 총 4코트가 조성됐다.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비옥한 평야 지대는 대부분 논농사가 이루어지며, 구릉에서는 밭농사와 함께 소규모 장류를 생산하는 식품 회사들이 설립되어 농가의 소득을 돕고 있다. 

반월리 삼절 정려

반월리 삼절정려(三絶旌閭)는 김노성, 김양기, 김양기 처 경주 최씨(慶州崔氏) 등 세 사람의 충절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월산마을에 있다. 

김노성은 호가 서암(書庵),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풍산면 도림리(현 풍산면 반월리)에서 태어났다. 평소에 용력이 뛰어나고 지혜가 출중했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에 자원해 선봉에 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전사해 조정에서 공조 참판 벼슬을 증직했다. 1891년(고종 28)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명했다. 

김양기는 김노성의 아들로 자는 윤행(允行)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식이 높아 향리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효행으로 1891년 동몽교관의 증직과 정려가 내려졌다. 

김양기의 처 경주 최씨는 최시린의 딸로 1812년(순조 12)에 김양기와 혼인했다. 시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해 1891년 정려가 내려졌다. 

반월리 삼절 정려는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담장 출입문 머리의 삼강문(三綱門) 현판은 1892년(고종 29) 3월에 지군(知郡) 윤병관(尹秉觀)이 썼다. 정려각에는 ‘창의 증돈령부 도정 증공조 참판 안동 김노성 지려’(倡義贈敦寧府都正贈工曹參判安東金魯聲之閭), ‘효행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안동 김양기 지려’(孝行贈童蒙敎官朝奉大夫安東金襄基之閭), ‘열녀 봉 숙부인 경주 최씨 지려’(烈女封淑夫人慶州崔氏之閭)의 현판이 걸려 있다. 

▲반월리 삼절 정려.

월산마을 당산제

월산마을 주민은 풍년과 좋은 일만 생기길 기원하며 매년 정월대보름 전날(음력 1월 14일) 저녁에 마을 동쪽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제는 일주일 전부터 시작이 된다. 마을에서 제주를 선정하면 제주는 일주일 동안 궂은 곳이나 부정한 곳은 가지 않으며, 당산나무에 금줄을 치고 이곳 돌 당산에도 금줄을 쳐 부정한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게 된다.

음식은 제주가 일주일 내 목욕 후 음식을 장만한다. 정월 14일이 되면 마을 주민이 모두 모여 농악을 울리며 동네에 있는 우물을 찾아 우물굿을 신명나게 하고, 우물물을 마시는 주민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주문을 외고 농악을 하며 마을을 돈다. 그리고 당산나무 주위에 모여 모닥불을 피우고 주민 모두가 음복을 하고, 흥겨운 마음으로 마을의 안녕을 빈다.

음력 1월 14일 밤 12시 전에 제주는 제실에서 상을 차리고 엄숙하게 절차를 따라 제사를 모신다. 제사는 전해오는 격식에 따라 2시간에 걸쳐 모시게 된다. 제사가 끝나면 주민은 농악을 올리며 흥겹게 한판 어울리면서 소원을 빌게 되며, 제주는 상에 올려놓은 돼지머리를 당산 밑에 묻는다. 

▲월산마을 당산나무.

월산마을 입석

월산마을에는 마을 입석 2기가 있는데, 반월지형 양쪽 끝에 각각 하나씩 세워져 있다. 마을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에 위치한 입석은 주산에서 우백호 지맥이 내려와 멈춘 곳에 위치하고 있다. 크기는 높이 158센티미터(cm) 폭 28cm, 두께 30cm이다. 마을로 진입하는 입구 길가에 서 있는 입석은 높이 90cm, 폭 26cm, 두께 7cm이다. 2기 모두 자연석 화강암이며, 마을사람들은 2기의 입석을 당산입석으로 섬기고 있다.

▲월산마을 입석1
▲월산마을 입석2

형제보(兄弟洑) 유래담

700여 년 전 반월리에 설 씨 형제가 살고 있었다. 두 형제는 각별한 우애가 있어 형이 외출을 하면 아우가 반드시 따르고, 아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형이 앞장서 도와주어 따로 살고 있기는 하지만 한집에서 사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느 날 이 마을에 대홍수가 나서 들판이 물바다가 되었고, 마을도 물에 잠길 위험에 처했다. 물이 점점 불어나자 마을 사람들은 처자식을 돌볼 겨를도 없을 만큼 위급해 모두 자기 자신의 목숨 구하기에 급급했다. 이때 아우는 형이 무사해야 가문을 잇는다는 생각에 자기 집이야 물에 잠기든 말든 형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형의 집이 물에 잠기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겨우 형의 집을 구할 수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통째로 물에 잠겨 수마가 할퀴고 간 마을에는 멀쩡한 집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운 것인지 아우의 집은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두 형제의 집만 남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형제의 우애가 하늘을 감동시켰다고 말했다. 이렇게 우애가 지극한 형제는 자기들의 편안함을 위해 살지 않고 착한 일이면 무엇이든 힘을 합쳐 행했다. 

반월리 앞들은 들이 넓었지만 가뭄이 잦아 한 번 가물면 흉년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뭄만 들면 마을 사람들은 서로 물을 대겠다고 싸우는 일이 빈번했다. 두 형제는 반월리 앞들의 가뭄 걱정을 덜어주고자 사천을 막아 보(洑)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두 형제는 새벽부터 일어나 돌을 나르고 흙을 날라 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고 달이 떠오를 때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를 만들기에 열중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구경만 하다가 보가 거의 자리를 잡아가자 두 형제를 도와 함께 보를 쌓게 되었고 수일 내에 보가 완성되었다. 마침내 보에 물이 가득 차 출렁거리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이제 가뭄 걱정을 덜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사람들은 이 보의 이름을 '형제보' 또는 '설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반월리 앞들은 가뭄에도 걱정이 없었고, 보를 잘 관리해 마을 사람들 간의 물싸움은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 형제는 우애 좋은 설씨 형제로 추앙되었고, 형제 간 우애를 보여 주는 귀감이 되어 “형제 간에 우애하려면 설씨 형제같이 하라”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형제보(兄弟洑) 유래담은 설씨 형제가 서로 도와서 홍수를 막아냈다는 우애담이자 교훈담이며, 형제보(兄弟洑)라는 이름에 얽힌 지명 유래담이기도 하다. 설씨 형제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진 형제보는 반월리 들녘 수리 관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형제보가 있던 자리.

학동의 한이 서린 장원봉

아미산 꼭대기에는 시루봉이라고 부르는 봉우리가 하나 있다. 봉우리 모양이 아주 큰 시루를 딱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루봉은 삼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딱 한 쪽 면으로만 오를 수 있게 되어 있다. 

풍산면 상죽마을 뒤에 서당 터라 하는 곳이 있는데, 옛날에 이곳에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풍산과 금과 쪽 학동들이 모여 이 서당에서 공부를 했는데, 서당에서 시험 볼 때마다 장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학동들은 그 사람이 부럽기도 했고 질투도 났다. 그중에서도 유독 질투심과 시기심이 많은 한 학동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도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번번이 장원을 하지 못하자 속이 매우 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혼자 생각하기에 이 사람을 그냥 두면 자신이 한 번도 장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루는 늘 장원을 하는 사람을 감언이설로 꾀어내어 시루봉으로 함께 놀러 가자고 했다. 시루봉에 놀러간 친구들은 오랜만에 술 한 잔씩 돌려 먹으며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 있었다. 한참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아지자 시기심을 가진 학동이 장원한 학동을 옆으로 불러내어 이야기를 하는 척하며 발로 차서 밀어 버렸다. 장원한 학동은 바위 밑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굴러 떨어져 죽었다. 다른 친구들은 장원한 학동이 발을 헛디뎌 바위 밑으로 떨어진 줄로 알았다. 장원한 학동이 떨어지면서 뻘건 피를 흘렸는데, 아직도 시루봉 아래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장원한 사람의 한이 바위에 남아 있다고 하여 그 봉우리를 ‘장원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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