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국장] 부모님 고향 순창에서 살기로 결심하다
상태바
[최국장] 부모님 고향 순창에서 살기로 결심하다
  • 최육상 기자
  • 승인 2021.02.03 2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순창. 언제 들어도 반가운, 부모님 고향이다. 친가, 외가 모두 순창읍이다. 부모님은 결혼하시며 서울에 터를 잡으셨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어렸을 적, 순창에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계셨다. 친할아버지는 내가 꼬맹이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가물거린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 세상에 안 계셔서 사진으로만 기억한다. 형제자매가 많은 아버지(십남매 장남ㆍ작고)와 어머니(칠남매 장녀ㆍ79) 덕분에 순창에는 친삼촌, 외삼촌, 고모, 이모, 사촌 형ㆍ누나ㆍ동생들이 많았다.

내게 순창은, 방학과 명절이면 으레 찾게 되는 시골집이었다. 초ㆍ중ㆍ고 학창시절의 방학 대부분을 순창에서 보냈다. 서울에 살면서 1년에 꼬박 두세 달은 순창에서 지냈다. 순창은 부모님 고향이면서, 따스한 추억이 몽글몽글 맺힌 어린 날 나의 시골집이었다.

홀로 순창에 이사 온 지 며칠이 지났다. ‘열린순창’에서 기자로 근무를 시작했다. 취재 차, 때로는 취재를 핑계 삼아 강천산, 소방서, 여중, 군청, 일품공원, 장날 떡집, 경로당 등 몇 군데를 다녔다. 아파트와 관공서, 몇몇 건물들이 어렸을 때의 풍경을 바꿔 입었다. 도로가 번듯하게 뚫리고 어릴 적 뛰놀던 어두운 골목길은 환하게 밝아졌다. 순창은 그 동안 많이 변화하고 발전했겠지만, 가는 곳마다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였을까. 내 눈에는 익숙한 그대로였다.

읍내라는 한정된 울타리 안이지만, 순창에서 며칠을 지내보니 참 평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정 많은 손길을 내미셨다. 먹는 음식마다 탄성을 자아냈다. ‘2대째’ 볶음밥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외밭골’ 김치찌개는 시골의 깊은 맛이 담겼다. ‘찐이야’ 애호박찌개는 3인분 같은 1인분이었고, ‘전주현대옥’ 남부시장식 콩나물국밥은 새로운 맛이었다. ‘매일통닭’은 상상을 벗어났고, ‘막창 순댓국’은 난생 처음 맛 본 별미였다. 대부분의 음식들을 함께 드셨던 외삼촌은 “순창 사람들은 평소에 이런 음식을 먹어서 크게 맛있다는 말을 잘 안 한다”고 말씀하셨다. 한 집 한 집, 서울에 내다 놓으면 사람들로 북적일 음식들인데 순창 사람들만 그걸 모른다.

순창에 온 뒤 공기도, 음식도, 사람들도 모두 좋았다. 그러다 심각하게 고민되는 문제가 처음 생겼다. 2만7810명, 순창군 인구 숫자다(2020년 12월 기준, 국가통계포털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현황 집계). 나는 “순창에 한 때 10만 명이 넘게 살았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종종 들으며 자랐다. 내가 세상에 나오던 1971년 이전 순창에 10만 명 이상 살았다고 하니, 그 사이 70퍼센트 가량이 줄었다,

순창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열린순창’ 기자 업무를 시작했다. 열심히 살아가시는 군민들과 함께 ‘살기 좋은 순창’을 알리도록, 순창군의 문제들을 타협 없이 비판하며 대안을 찾도록 노력하겠다. 군민들께서 많이 도와주십사, 인사 말씀 올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