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39)/ 병영3-신고식
상태바
바람이분다(39)/ 병영3-신고식
  • 선산곡
  • 승인 2021.02.03 20: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대배치를 받으면 치르는 의식이 있다고 했다. 이른바 신고식, 전입자의 얼을 빼 놓는 그 의식은 공공연한 군의 전통이며 그 경중은 부대마다 다르다고 했다. 훈련병시절에 끼리끼리 모여앉아 신고식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가 더러 있었다. 당했으니 갚는다는 보상심리가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사병들의 전통이 있다는 어두운 소재였다.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한번은 당연히 치러야할 공공연한 통과의례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눈짓을 따라 천정 높은 건물로 친절히 나는 안내되었다. 비커와 유리관 막대들이 긴 테이블에 정연히 놓여있는 실험실이었다. 알코올에 담겨있는 온갖 표본물들이 섬뜩하게 벽 쪽에 진열되어있었다. 파란 불빛이 새어나오는 배양인큐베이터에서 이따금 가르릉거리며 들려오는 소리조차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상병 서넛이 내 앞에 섰다. 전군을 통해 정해진 전입신고를 연습하는 절차라지만 그 신고식암기가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말이 그렇지 교육을 빙자한 얼차려라는 것을 누가 모를까. ‘소리가 그것밖에 안 나오나?’로 시작해서 ‘다시!’가 반복되고 더러 ‘이것 봐라?’라는 말이 서서히 고조되려는 순간이었다. 실험실 문이 벌컥 열리고 동시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뭐야!”

모자는 벗었지만 견장에 하얀 대위계급장이 눈에 보였다. 왼팔에 노란 당직사령 완장을 찬 깡마른 장교가 우뚝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병들이 주춤거리는 동안 대위의 입에서 짧은 명령이 떨어졌다. 돌아 가! 그리고 누군가 하나를 불러 세웠다. 이어 짧게 상병선임자를 질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비공식신고식은 그렇게 끝났다. 행운이었던 것이다.

아침이 되었다. 부대 앞 도로로 군용트럭들이 지나가는 소리들이 요란했다. 중사, 상사 계급장을 단 하사관들과 중위, 대위, 소령 계급장을 단 영외거주자들이 통근트럭에서 내려 쏟아져 들어왔다. 몇몇 하사관과 장교들이 구석에 선 내 모습을 흘깃 쳐다보며 ‘신병 왔나?’ 라고 한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장교 하사관 수가 사병보다 더 많은 부대라는 껄렁병장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일루 와!”

상사 계급장에 빨간 표시가 있는 인사계 주임상사가 거친 소리로 나를 불렀다. 간밤에 주소를 써보라던 김 병장에게 몇 마디 묻더니 내 기록카드를 앞뒤로 살펴보고는 야릇하게 웃었다. 인물 좋은 인상을 받았지만 나이 들어 보이는 그 모습이 산전수전 다 겪은 너구리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임상사와 김 병장이 나를 데리고 들어간 행정과장실은 베니어로 된 칸막이벽에 쪽문 하나 열면 있는 곳이었다. 이골 난 신고식 고함지르기가 끝나자 비로소 행정과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임상사가 너구리라면 대위 계급장을 단 행정과장은 흡사 저승사자 같다는 인상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에 광대뼈가 드러난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검었다.

“이 새끼 쓸 만 해?”

전입신고를 마친 나를 바라보며 과장이 하는 말이었다. 병장이 네! 짧게 대답했고 무서운 안광으로 나를 쏘아보는 그의 얼굴에 빙글거리는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 새끼 행정병으로 보직명령 내!”

두고 쓰는 말인 듯 ‘이 새끼 저 새끼’란 말이 입에 달려 있었다. 주특기 의무병인 나는 그날로 야시소 본부행정병이 된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순창 농부]순창군창업유통연구회 변수기 회장, 임하수 총무
  • 최순삼 순창여중 교장 정년퇴임
  • 선거구 획정안 확정 남원·순창·임실·장수
  • 순창시니어클럽 이호 관장 “노인 일자리 발굴 적극 노력”
  • 군 전체 초·중·고 학생 2000명대 무너졌다
  • “조합장 해임 징계 의결” 촉구, 순정축협 대의원 성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