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23) – 동계면 현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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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23) – 동계면 현포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3.03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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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23) – 동계면 현포리

현포리(玄圃里)는 동계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현포마을과 마상동마을, 신촌마을, 연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원부(南原府)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순창군에 귀속되면서 동계면 현포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구는 2021222일 기준 188가구, 366명으로 남자 170, 여자 196명이다.

마을 유래

현포마을
현포마을

 

현포(玄圃)란 중국 곤륜산 꼭대기에 여신 서왕모(西王母)가 기거한다는 곳이다. 옛사람들이 신선이 거주할 만한 명당이라 하여 현포리(玄圃里)로 부른 것 같다. 사자봉(溮子埄)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온 산맥이 오동리 뒤에서 솟아 오른 자라봉(鶿山자산)을 주산으로 동계고등학교 정문 앞부터 높이 93여 미터 산맥이 흘러 동계초등학교까지 내려온 마을이 감밭, 곧 현포마을이다.

마상마을
마상마을

 

마상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500미터 떨어진 몰미산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말의 구시(밥통) 자리가 된다 하여 마상굴이라 불렸다. 감굴사 터가 있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분지로 형성되어 옛날부터 난세에 많은 사람이 피신하는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을 오른쪽 끝 굽들 남단 마을 앞에서 흘러간 도랑 끝 부근에 우뚝 솟은 큰 바위 굽들에서 황새 떼가 보금자리를 틀었다는 황새바위가 있다.

 

신촌마을
신촌마을

 

신촌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편으로 1500미터쯤 떨어진 동계천을 동출서류(東出西流)로 안고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신촌마을 동쪽으로 주월(舟月) 가는 길 옆 동계천 변에 큰 소()가 있고, 용이 못 된 귀가 달린 큰 구렁이가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는 비늘바위가 있다.

연산마을
연산마을

 

연산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600미터 떨어진 장태봉(일명 사다리봉)을 등지고 아늑한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동계초등학교

1920121일 동계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한 후, 구미분교성동초등학교영동분교를 차례로 통폐합했다. 작년 121일 개교 100주년을 맞았고, 올해 98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동계초등학교
동계초등학교

 

동계장

동계장(東溪場)은 동계면 소재지인 현포리의 옛 이름이 감밭이어서 감밭장이라고도 불린다. 19311225일에 조성되었다. 장날은 5, 10일장으로 지속되다가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2, 7일장으로 변경되었다. 동계장은 면에 서는 장이지만, 우시장이 있어서 소돼지개 등 가축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인근 남원, 임실 등지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 하루 종일 장이 성대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동계장에서는 봄에는 매실이 유명하며, 가을에는 밤자연산 송이버섯 등이 지역 특산품으로 많이 거래된다. 특히 특산물인 밤은 전국 각지 상인들이 사 간다.

동계시장
동계시장

 

현포보 수로와 중건 불망비

옛날 현포 일대 들은 상평(上坪윗들)과 하평(下坪아랫들)로 나뉘어 있었다. 상평은 비가 조금만 와도 냇물이 넘쳐 논밭을 덮쳐 농작물에 피해를 주었고, 하평 역시 관개시설이 없어 버려진 땅으로 농민들은 매년 거듭되는 흉작을 면치 못해 고통 받았다 한다.

수리 불안전 지대였던 현포 들판을 원활한 관개 급수로 옥토로 탈바꿈 시킨 이가 바로 김원보(金元寶). 그는 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구축공사를 시행했으나 홍수로 인해 공작물이 유실돼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해 고심하던 중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보()를 개설해 옥토를 만들어 주민들을 기쁘게 해주라며 그 보의 설치지점을 일러주었다 한다. 깜짝 놀라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그 길로 사동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들판으로 나와 사방을 살펴보니 과연 꿈에서 백발노인이 일러주던 곳이 그대로 보였다. 그는 서둘러 꿈에서 일러준 대로 삼대(蔘帶)를 군데군데 꽂아 수로를 낼 곳을 표시했다. 그리고 당시 관아(남원부)에 수로개설을 진정했다. 남원부사는 수리시설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곧바로 공사를 시작하도록 했다. 인근마을 주민들을 동원해 보를 막고 하평까지 1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석축으로 수로를 내는 공사를 시작했다. 중간 중간 어려운 곳도 많았으나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 일을 해냈다. 이로써 현포의 상하 들은 한발이나 수해를 면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때가 1736(영조 12)이었다. 이후 주민들은 김원보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 1792(정조 16)에 수로 암벽 위에 화강암으로 된 시혜비를 세웠다.

현포보 수로와 중건불망비(重建不忘碑)는 동계면 현포리 산2번지와 주월리 476번지 상류에서 500여 미터의 수로를 내려가야 하는 험한 지형에 있다. 수로 면적은 66348평방미터(). 불망비 앞면은 제언사 당상관 김언립이 처음 보를 세운 것을 기리는 불망비, 증가선대부 공조참판 김원보가 보를 중축했음을 기리는 불망비, 또 김세곤이 보를 중축한 것을 기리는 불망비로 세 사람이 보의 창건과 중축에 관여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또 뒷면에는 임자년(1912) 3월에 현포보를 중건했다고 되어 있다. 현포보 수로는 현대에 들어와 다시 농와(農窩) 황윤현(黃允賢)이 보수했다. 현포 보수로와 중건불망비는 1992620일 전라북도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었다.

현포보 수로와 중건불망비
현포보 수로와 중건불망비

 

현포리 고분떼

현포리 고분 떼는 현포리 연산마을 구 동계중학교 동남편 구릉 말단부와 사면부 약 35부 능선 사이에 있다. 2003년 전북대학교박물관에서 순창 문화유적분포 지도제작을 위해 실시한 지표조사 때 학계에 처음 보고되었고, 2013년 군산대학교박물관 주관으로 지표조사가 추가로 이루어졌다. 오래전 대규모 밤나무 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분이 심하게 훼손되고 유실되었다. 지표조사만 이루어져 고분 구조와 조성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 또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횡혈식석곽묘(돌덧널무덤)군과 옹관묘(독무덤) 1기를 확인했고, 토기 조각과 옹관이 수습됐다. 현재 육안으로 확인되는 석곽묘는 약 56기 정도이나 그 외 고분으로 보이는 얕은 봉분도 일부 확인된다.

현포 고분떼에서 수습된 옹관
현포 고분떼에서 수습된 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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