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국환 독립유공자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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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환 독립유공자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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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3.1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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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치 출신, 시련 이겨낸 의인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주역

노국환(19231987, 송계 노병권 3노일환 제헌의원 동생) 선생은 쌍치면 운암리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등의 학생운동으로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을 포상했다.

국가보훈처는 올해 제102주년 31절을 맞아 275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했다. 이번에 포상된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36(애국장 28, 애족장 108), 건국포장 24, 대통령표창 115명이다.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

중앙고보 5인 독서회는 당시 중앙고보(현 서울중앙고) 4학년생이었던 노국환이 평소 뜻이 맞는 학우인 이기을(강경화 전 외무장관 시아버지), 황종갑(육군 소장 예편), 유영하, 조성훈과 함께 1940년에 최복현 지리 교사를 지도교사로 모시고 일제가 금서로 지정한 책을 몰래 읽으면서 민족정기 고취와 독립 쟁취를 목적으로 만든 독서 조직이다.

우리 5인은 시험기를 제외하고는 12회씩 함께 자연, 국사 관계 서적을 읽고 토론을 나누었다. 토론에 의견이 대립되고 결론이 나지 않을 때는, 다음 날 선생님에게 달려가 문의하기도 했다. 4학년 10월경 어느 날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5인은 (북한산 자락) 우이동 계곡으로 소풍을 나갔다. 우리는 마음껏 술을 마시고 떠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우리가 날마다 이렇게 고담준론만 할 것이 아니라, 내일을 위해 좀 더 의의 있는 일을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1주일에 2회씩 모일 것이 아니라, 역사와 정치(민족의 진로)에 관한 문제를 한 문제씩 연구해서 11회씩 모여 토론하는 독서회를 갖자는 것이었다. 모두 찬성이어서 5인조 독서회라 하고, 매주 일요일 모이기로 했다.” (지산 최복현 선생 회갑기념 논문집, 민중서관, 1966. 294~299쪽에 실린 노국환의 글)

5인독서회는 19417월 활동 범위를 확대했다. 노국환은 그의 부친(송계 노병권)과 큰형 노일환(당시 동아일보 기자)을 통해 김성수송진우백관수정인보 등 인맥을 동원해 국제정세와 임시정부 소식을 알아 오는 역할을 맡고, 이기을과 황종갑은 고향이 함흥이니 여름방학 동안 고향으로 가서 항일유격대 소식을 알아보도록 하고, 유영하와 조성훈은 일본에 유학 중인 선배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역할을 분담했다. 그런데 황종갑이 방학중 활동을 적어 노국환에게 보낸 서신이 함흥경찰서 사전검열에 발각돼 5인 학생과 최복현 교사를 차례로 검거해 함흥경찰서로 압송되었다.

당시 함흥경찰서는 독립운동가와 사상범을 혹독하게 다루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일경은 자백을 강요하며 가혹한 고문을 했다. 학생들과 교사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이기을의 회고에 의하면 몸이 약한 노국환이 고문을 당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가게 되면 그날은 고문하지 않아 모두가 덕을 봤다고 한다.

최 교사는 내 강의를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나는 어떠한 처형도 감수하겠으니 학생들은 석방해 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이 요청이 함흥지역 검사국에서 받아들여져 학생 5명은 함흥형무소에서 100여 일만인 125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고, 최 교사는 1943년 출옥했다.

 

총독부 특명 청주경찰서 사건

총독부 학무국은 현상윤 중앙고보 교장에게 이들을 퇴학시키라고 지시했지만 현 교장의 헌신적 노력으로 학생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국환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194212월 총독부 경무국은 전북경찰국에 비밀지령을 내렸다. 노병권 집안은 항일 가정이니 전 가족을 검거해 노병권과 돈독한 관계인 김성수송진우백관수 등을 구속할 확고한 단서를 포착하라는 것이었다.

지시받은 전북경찰국 고등과 이진하 경부는 노국환의 고향 본가를 수색하고 가족 동태를 조사한 후 아버지 노병권에게 집안의 불온서적을 모두 없애고 집안에 쓰인 단기 연호를 없애라는 등 큰 도움을 주고, 총독부 경무국에 노병권 집안을 조사한 결과 별 의심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광복 후 반민특위에서 그의 이런 공로를 인정해 형을 감면해주었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은 전북경찰이 노병권에게 매수되었다고 판단하고, 연고가 없는 청주경찰서에 노병권 가족을 구속해 수사하라는 특별명령을 내렸다. 청주경찰서는 1943512일 서울 교부동 외숙모 집에서 노국환을 체포해 구속했다. 구월산 여행 중이던 노병권은 가까스로 피신했다. 청주경찰서 형사들이 심문한 내용은 주로 김성수송진우백관수 등 국내 우익지도자들의 지령 여부에 초점을 두었다. 증거가 불충분하자 당시 경찰서장 석천(石川)과 고등계 주임은 노국환의 주거를 본적지로 제한해 학교도 중단하게 하고 8월에 석방했다. 노국환은 순창 도착 후 타지 출타 시 순창경찰서 고등계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제약을 받았지만, 힘이 미치는 대로 학병징병징용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학병은 일차적으로 거부해야 하며, 부득이 출정하게 되면 현지에서 도피해 광복군에 합류토록 계몽했다.

반민특위 해체와 끝없는 시련

노국환은 1946년 보성전문 3학년에 복학해(원래 2학년으로 복학해야 했으나 항일운동 특전으로 3학년으로 복학) 6월에 보성전문을 졸업하고 1949년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광복 후 1948510일 실시된 첫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순창에서 당선된 노국환의 큰형 노일환은 농지개혁법과 친일파 척결을 위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에 앞장서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검찰부의 차장을 맡아 정의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친일매국세력의 반격으로 반민특위는 1949104일 해체되었다. 이에 따른 여파로 노씨 집안은 당시 친일매국세력이 주축이 된 정부 당국으로부터 온갖 위협과 고초를 겪으며 시련의 삶을 살게 된다.

5인독서회 회원이었던 황종갑이 육군 장성(소장 예편)이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 당시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다면 충분히 포상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노국환은 당시 일본군 장교 출신과 친일인사들이 득세하는 정권 아래에서 그러고 싶지 않아 거부했다고 한다. 중앙고보 5인회 사건은 지도교사를 포함해 총 6인이 가담했다. 최복현 교사가 1990년 애족장을 포상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 노국환을 마지막으로 6인 전원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게 됐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지은 시

노일환국환의 부친인 송계 노병권은 한학자로 생전에 많은 한시를 지었다. 전해오는 시만 337편에 달한다. 다음은 그가 셋째아들 국환을 위해 1942년에 지은 한시다. 이 시에 언급된 송자(松子)는 노국환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題國煥壁(제국환벽)

背郭一堂成(배곽일당성) 성곽을 등져 집 한 채 이루어지니

中有耕樵道(중유경초도) 밭 갈고 나무하는 길이 있네

松子滿空庭(송자만공정) 솔방울이 빈 뜰에 가득하니

關門故不掃(관문고불소) 문 닫고 일부러 쓸지를 않네.

 

<사진>노국환과 후손 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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