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역사(20) 낙랑군 몰아낸 미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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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역사(20) 낙랑군 몰아낸 미천왕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3.2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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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은 고구려 제15대 임금이다. 이름은 을불(乙弗) 또는 을불리(乙弗利), 우불(憂弗)이다. 서천왕의 손자이자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창조리의 정변으로 등극한 미천왕은 봉상왕의 학정으로 인한 폐해를 바로잡아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성장시켜 나갔다. 8년 동안 방랑하면서 머슴살이도 해보고, 소금장사도 하면서 민중의 생활을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과중한 억압과 착취를 완화 조처했다.

당시 요동반도 서쪽 지역에는 한나라가 옛 고조선 영역 일부에 설치한 낙랑군대방군요동군현도군이 남아 있었고 이를 통제하던 중앙정부는 서진(西晉265~316)이었다. 4세기 초에 이르러 서진의 국력이 쇠잔해져서, 그에 따라 요동지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거의 상실되다시피 했다. 미천왕은 이런 유리한 정세와 국면을 놓치지 않았다. 요동반도 지역에 남아 있던 외래 침략세력의 거점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다. 302년 현도군을 들이쳐 8000명의 포로를 잡아 평양으로 보냈다.

311년에는 요동군 서안평현을 점령했다. 요동군 서안평현은 원래 안평국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안평이라고 불렸으며, 고구려의 공세로 처음 위치에서 쫓겨나 당시에는 요동군 중심지인 요동성에서 동쪽으로 60리 지점에 있었다.

미천왕은 연이어 313년에는 낙랑군 지역을 완전 점령함으로써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나라에 의해 설치된 낙랑군이 400년 만에 고조선의 영토에서 완전히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314년에는 그 남쪽에 있었던 대방군 지역도 점령했다. 그리고 315년에는 현도성을 쳐서 무너뜨리고 수많은 적군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고조선 옛 땅에서 완전히 쫓겨난 낙랑군 잔여세력은 요서 지방에 있던 모용선비족의 나라(전연)에 가서 투항했고, 전연은 대릉하 유역에 낙랑군을 설치했다. 또 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나 대방군과 현도군의 잔여세력들도 전연에 가서 투항했고 거기에서 작은 군으로 재생했다. 그것은 덕흥리 벽화무덤(고구려 유주자사 진의 무덤)의 묵서에 낙랑군대방군현도군의 태수들이 나오는 사실, 4세기 기록에 해당한 관직명들이 보이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요서지역 낙랑군은 6세기 북위 때까지도 여러 차례 개편되고 그 위치도 바뀌었다. 우리나라 일부 역사가들은 중국 역사기록에 요서지역에 낙랑군이 나오는 것을 놓고 마치 낙랑군이 처음부터 지금의 평양지역(식민사학과 주류 사학계)이나 요서(재야사학계)에 설치돼 있었다고 주장하는 함정에 빠져 있는데, 요서 낙랑군은 요동지역에 있던 낙랑군 세력이 쫓겨 가서 설치된 것이다. 313~315년 사이에 고구려가 3개 군 지역을 탈환함으로써 요동지방에는 오직 요동군 하나만이, 그것도 작은 군으로 남아 있게 됐다. 319년 요동군에 있던 진나라 평주자사 최비가 고구려 우문선비 등과 연합해 모용선비를 치려다 실패하고 고구려로 도망 온 후 신흥세력인 모용선비가 요동군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요동지방의 완전 수복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미천왕은 요동지방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모용선비 세력 때문에 요동군을 몰아내지 못한 채 331년에 사망했다. 미천(美川) 들녘에 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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