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역사(21) 고구려의 위기, 제16대 고국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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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역사(21) 고구려의 위기, 제16대 고국원왕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3.3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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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고구려 하면 활발한 정복 활동이나 전쟁에서의 장엄한 승리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시련을 겪었던 왕이 있다. 고구려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재위 331~371)이다.

그는 미천왕의 아들이며, 소수림왕의 아버지다. 3312월에 미천왕의 뒤를 이어 제16대 왕으로 즉위했다. 고국원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 고구려는 동방의 신흥 강국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주위에는 그런 신흥 강국이 둘이나 더 있었다. 바로 전연(前燕)과 백제(百濟)였다. 고국원왕 대에 고구려는 이들 나라와 일대 결전을 치렀고, 아쉽게 모두 패배했다.

342년 겨울, 전연의 모용황은 용성으로 천도한 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전연군은 평탄한 북쪽 길로 15000, 험난한 남쪽 길로 5만 대군을 보내는 기만전술을 펼쳤다. 이에 속은 고구려군은 남쪽 길에서 크게 패해 환도성이 함락됐다.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미천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을 가져갔고 5만 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343, 고국원왕은 전연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며 평양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355년에는 전연에 간청해 모후 주씨를 돌려받았다(이후 전연은 전진의 공격을 받아 370년에 멸망함).

고국원왕은 369년에 백제를 공격했으나 치양에서 왕자 근구수에게 패했다. 37110월에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공격해오니 고국원왕이 이를 막다가 활에 맞아 전사했다.

이렇게 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패배를 두 차례나 당했으니 무능한 왕으로 치부될 만도 한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당시 전연은 욱일승천하는 기세를 타고 있었으며, 전연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모용한은 전연 최고의 전략가였다. 또 평양성 전투 상대는 백제 최고의 정복군주 근초고왕이었으니 역시 적수를 잘못 만난 셈이었다.

고국원왕은 무능했다기보다는 불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고구려 왕권을 안정시킨 인물이었으며, ‘태왕(太王)’으로 불리는 첫 번째 왕이었다. 왕 중의 왕이란 뜻의 태왕이란 칭호를 받았다는 것은 고국원왕이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신망을 받고, 왕의 권위를 높이 드러냈었음을 시사한다. 비록 뼈아픈 패배를 두 차례나 당하기는 했지만 고국원왕은 전쟁 때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앞장서는 군주였다. 화살에 스러진 그의 죽음도 사실 전쟁터 최전방에서 지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통치자의 덕목은 전쟁의 승패가 아니라 어떤 지도력을 발휘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오랜 기간 평양 일대를 경영하면서 고구려를 새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정치적경제적인적 기반을 확보한 점은 눈에 보이지 않은 고국원왕의 업적이었다. 그의 아들 소수림왕에 의해 이뤄진 율령 반포, 불교 공인, 태학 설립 등으로 대표되는 체제 개혁도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고국원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 광개토대왕이다. 고국원왕의 또 다른 시호는 국강상왕(國罡上王)이다. ‘고국원이나 국강상이란 말은 같은 뜻으로 왕릉이 위치한 장지명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광개토왕의 공식 칭호에도 국강상이란 이름이 들어있으니, 고국원왕과 같은 곳에 왕릉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손자 광개토대왕은 전연의 선비족과 백제를 정벌해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당한 과거의 수모를 그대로 되갚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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