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25) - 쌍치면 금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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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25) - 쌍치면 금성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4.07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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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리(金城里)는 쌍치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행정리에 피노마을내동마을신촌마을이 있다. 동쪽으로 용전리, 서쪽으로 종암리, 남쪽으로 쌍계리, 북쪽으로 오봉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에서 추령천이 남에서 북으로 흘러가며, 서쪽은 국사봉운암산 등 높은 산이, 북쪽은 계룡산이 둘러막고 있다. 2021326일 기준으로 인구는 106가구, 237(남자 100, 여자 137)명이다. 주민 대부분이 벼농사와 고추블루베리복분자를 재배해 소득을 올리고 있다.

 

마을 유래

 

하치면 소재지였던 피노마을은 오일장이 섰던 큰 마을로 189411월 동학 농민군의 전봉준(全琫準) 장군이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피노(避老)라는 마을 이름은 당쟁이 심하던 조선시대 때 노론 세력을 피해 은거한 지역이라는 데서 연유한 이름이라 한다.

내동(內洞)마을은 국사봉과 세자봉, 용두봉에 둘러싸여 있으며, 국사봉 아래 절골에 조선 중종(中宗) 때 현씨와 임씨가 이주해 마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신촌(新村)마을은 1962~1963년 기독교봉사회의 지원을 받아 밭 40만 평방미터()를 개간해 이웃한 피노마을, 내동마을, 삼장마을과 팔덕면에서 주민이 이주해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다.

피노마을 전경
피노마을 전경
내동마을 전경
내동마을 전경
신촌마을 전경
신촌마을 전경

녹두장군 전봉준관

녹두장군 전봉준관은 동학농민혁명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全琫準1855~1895)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전봉준이 체포된 장소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전봉준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충청남도 계룡산에 머물자 스님 한 분이 장군이 재기에 성공하려면 계룡산을 피하고 경천을 피해야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전봉준이 자금도 모을 겸 백양사로 내려왔는데, 계속 추격을 당하자 숨어들어 온 곳이 정읍 출신 옛 부하 김경천이 살고 있던 쌍치면 피노리였다. 현상금이 나붙자 돈에 눈이 먼 김경천은 전봉준을 밀고했고, 동원된 무뢰한에게 몽둥이로 다리를 맞아 뼈가 으스러지며 붙잡히고 말았다. 피노리 뒤에 있던 산 이름이 계룡산이었고 부하의 이름이 경천이었음을 전봉준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녹두장군 전봉준관은 20061123일에 준공해, 200742일 개관했다. 피체지(被逮地) 체험시설과 농촌생활체험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피체지 체험시설은 6개 동(210.04평방미터)으로 전시관주막부속채부대시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관은 전봉준 일대기와 동학혁명 전개과정을 전시해 동학농민혁명의 이해를 높이는 관람시설이다. 주막은 전봉준 장군이 붙잡혔던 주막을 재현해 놓은 시설로 당시 부엌봉당가구생활용품 등을 전시해 놓았다. 농촌생활체험관은 지상 2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목적실과 수련실, 가족실이 있다. 부속채로는 주막의 헛간창고를 재현해 놓았으며, 농기구 등을 함께 전시해 당시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부대시설로 피체지 표지석피체 유적 비문전봉준 장군상관리실 등이 있다.

녹두마을 전봉준관
녹두마을 전봉준관

총댕이마을

총댕이마을은 피노마을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 2015년 전북형 농촌관광거점 육성마을로 지정되어 201912월부터 운영되고 있으며, 농촌체험보다는 서바이벌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마을 이름도 순창에 총을 잘 쏘던 최영찬이라는 포수가 실제 있던 것을 생각해 포수나 사냥꾼을 뜻하는 옛말인 총댕이로 정했다.

본관에는 4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실과 세미나실, 70석 규모 식당이 마련돼 있다. 체험동에는 카페와 사계절 체험 가능한 실내사격장(표적식, 이동식)이 있고, 체험동 뒤편으로는 500평 규모의 야외 서바이벌 체험장이 있다.

서바이벌 체험은 비비탄을 사용하는 권총으로 전쟁놀이를 즐기는 레저스포츠다. 센서가 부착된 방호조끼와 헬멧(안전모)을 쓰고 두 팀으로 나누어 모의전투를 진행한다. 서바이벌 체험장에는 각종 은폐물과 엄폐물 등 인터넷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시설들이 재현돼 있다.

총댕이마을
총댕이마을

금성리 내동마을 느티나무

금성리 내동마을 느티나무는 조선 중종 때 마을이 형성되면서 심은 나무로 수령 440여 년이다. 10여년 년 전만 해도 정월 대보름이면 당산제를 지냈던 당산나무로, 나무 기둥이 심하게 굴곡 져 있지만 우람한 수형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소유했는데,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든다고 하자 마을 주민들이 회의 끝에 200원을 주고 사서 다시 마을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1982920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금성리 느티나무
금성리 느티나무

금성리 신촌 고분

신촌마을에서 서쪽으로 550미터 떨어진 곳에 도토실골이 있는데, 이 골짜기 서쪽을 휘감는 산줄기 끝 부분에 금성리 고분이 있다. 2003년 전북대학교박물관에서 순창 문화유적 분포 지도제작을 위해 실시된 지표조사를 통해 학계에 존재가 보고되었다.

금성리 고분은 오래전 도굴이 이루어져 개석(蓋石뚜껑돌)이 옮겨진 상태로 석곽 내부가 노출되어 있다. 석곽 내부에 흙이 채워져 있어 고분 구조를 상세하게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으로 추정된다. 현지조사에서 파악된 석곽 규모는 길이 80센티미터(), 너비 50, 높이 60이다. 유물은 수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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