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애 시인 ... 소녀 감성으로 구순에 첫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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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애 시인 ... 소녀 감성으로 구순에 첫 시집
  • 최육상 기자
  • 승인 2021.05.0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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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11주년 특집 기획 순창 노익장

여기 오판동(100), 정봉애(92) 두 어르신이 계신다. 두 어르신의 삶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오판동 어르신은 배운 게 없어 온몸으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1921년생, 100세 나이에도 괭이 들고 콩밭과 깨밭을 멘다.

정봉애 어르신은 형편이 괜찮은 집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졸업했다. 1929년생, 구순에 첫 시집을 냈고 펜을 잡고 시를 쓴다.

오판동 어르신은 4~5년 전 먼저 떠나보낸 아내가 그리워 전동자전차를 타고 매일 왕복 20여 분이 걸리는 길을 오간다. 고향(전남 담양)과 현재 삶터(전북 순창)를 넘나든다.

정봉애 어르신은 15년 전 떠나보낸 남편이 그리워 며칠 전 꿈에도 남편이 나타났다. 꿈속에서 만난 남편 이야기는 그대로 시로 승화되어 가슴에 맺힌 그리움을 떨쳐낸다.

낮에 길 가시는 모습을 뵈었는데, 제가 바빠서 인사를 못 드렸어요. 죄송해서 전화를 드렸어요.”

, 그랬어. 그러면 맴매 맞아야지, 맴매. 워쩌것어. 하하하.”

그래서 국수 사 드리려고요. 국수에 막걸리 한 잔 어떠세요?”

국수하고 막걸리? 좋제. 헤헤헤.”

지난달 29일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지인은 동행한 차 안에서 한 어르신에게 전화를 드렸다. 갑작스러운 만남이 이뤄졌다.

주인공은 16세에 결혼해 86세에 등단하고 90세에 첫 시집을 발간한 정봉애 시인. 올해 92세인 시인이 건넨 명함은 멋졌다.

인생 구순에 첫 시집 잊지 못하리

앞면에는 인생 구순에 첫 시집 잊지 못하리, 성원 정봉애 시인이라고 쓰여 있다. 뒷면은 더 인상적이다. “별빛이 익어가는 고요 속에 / 벽시계는 자정을 부르는데 / 오지 않은 잠 찾으러 헤매니 / 그 누구의 탓이런가 / 달빛마저 저리 차가우면 / 어찌하라는 건가감성을 자극하는 시 아래 이력이 담겨 있다. 1929년 남원 출생. 1943년 광산 사립학교 졸업. 1944년 결혼. 2014년 월간 문학공간 신인상 수상 등단. 2018년 전북문인협회 문학활동 공로상 수상.

첫 만남에 막걸리와 국수라니. 지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술자리를 핑계 삼아 취재를 시작했다. 대화는 은근슬쩍 방향을 잡아 여쭈면, 정 시인은 소녀다운 감성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냈다.

국수에 앞서 미니족발이 먼저 나왔다. 정 시인과 건배하며 순창막걸리를 한 잔 들이켰다. 열여섯 살 결혼이야기부터 물었다.

내가 성적도 좋고 한 게, (우리 집이) 먹을 만치 살았거든요. 오빠가 아부지한테 봉애 상급 학교 보낸다고 그랬다가 혼났어요. 그때 큰애기 공출이라고 일본놈들이 어린 처자들 잡아가는데 그놈들한테 뺏긴다고, 아홉 살에 학교 들어가서 열다섯에 학교 졸업한 나를 시집보냈어요. 그때가 열여섯이야.”

앞서 100세 오판동 어르신을 만나고 오는 길이어서 휴대전화로 찍은 오판동 어르신 사진을 보여드렸다.

이 할아버지가 백 살이에요.” “백 살? 우와~.” “여덟 살 오빤데 뭐가 우와에요?” “헤헤헤, 이 할아버지는 흙하고 사니까 건강해 보이시네.”

구순에 펴낸 첫 시집
구순에 펴낸 첫 시집

내가 시아부지한테 술 배웠당게

평소에 막걸리를 즐겨 드신다는 정 시인에게 언제 처음 막걸리를 드셨느냐고 여쭸다. 뜻밖의 답이 나왔다.

내가 막 결혼해서 새애기, 각시여. 근디 시아부지가 아가, 막걸리 한 잔 혀라고 권하시는 거여. ‘부끄러워서 술 못혀요마다했는데, 자꾸 한 잔만 받아보라고 하셔서 내가 시아부지한테 술 배웠당게. 헤헤헤.”

막걸리 한 잔을 비우자 정 시인은 진짜 소녀 감성을 드러냈다. 살짝 오른 취기에 기대 자연스레 시를 읊었다. 천생 시인이었다.

어저께 쓴 시가 있어요. 제일 마지막에 해가 저물면~ 철없이~ 또 누구를~ 기다리는지’, 이 대목 괜찮죠?” “. 좋은데요.” “좋아? 헤헤헤. 근디 나이가 들어서 근가, 이제 시심이 잘 안 나와.”

정 시인은 아들 다섯에 딸 둘, 칠 남매를 두었다. 큰딸은 스무 살에 낳아서 지금 일흔두 살이고, 서른다섯에 낳은 막내는 토끼띠(1963년생) 쉰일곱 살이란다. 큰 딸이 동생들 키웠겠다고 여쭙자 정 시인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얘들은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게 키웠제. 요즘 얘들처럼 (이것저것 다 챙겨가며) 키우려면 못 키우제. 자식들은 대전, 광주, 전주, 서울에서 살아요.”

여든 살에 컴퓨터 배운 꽃바구니

정 시인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노익장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코로나로 지난해에는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수요일에는 서예를 공부하고, 목요일에는 시 공부 모임을 하고 있다. 2008년에는 우체국에서 가르쳐줘 컴퓨터도 배웠다. 그때 만든 인터넷 공간의 별명(닉네임)꽃바구니. 지인은 정 시인을 꽃바구니님으로 불렀다. 여든 무렵 컴퓨터를 배우셨다고 거드니, 정 시인은 팔십 살이면 내가 젊었을 때네, 헤헤헤해맑게 웃었다.

지인은 순창에서 뒤늦게 시를 배워 구순에 시집을 펴냈다면서 서예도 늦게 배웠는데 잘 하신다고 말했다. 뭔가 좋아하시는 일이 있으니 삶의 열정도 샘솟을 터. 맑은 정신과 해맑은 웃음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정 시인은 서예 이야기에 무척 쑥스러워했다.

남곡 김기옥 선생님한테 배웠는데 아침마다 작가님하고 나를 데리러 와요. 끝나면 데려다 주고. 헤헤헤. 내 필체가 좋지는 않은데, 그냥 수련하는 마음으로 하는 거지.”

정 시인은 족발도 잘 드시고, 국수도 훌훌 잘 드셨다. “평소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냐고 물었다.

뭐든지 잘 먹어. 하루 세끼 다 먹제. 아침에는 사과 반쪽, 계란 한 개 먹고. (건강하시려고 적게 드세요?) 글제. 소식 혀. 헤헤헤. 낮에는 밥 먹고, 공부 모임 있으면 함께 먹기도 하고.”

알고 보니, 불순(?)한 의도로 시 공부

정 시인은 어떻게 시를 공부하게 됐을까.

바깥양반 돌아가시고 적적하고 우울했어. 열린순창을 보는데 박재근 그 양반이 글을 잘 쓰더라고. 한 번 만나야겠다고 열린순창에 전화를 걸었지. 순창문인협회 총무인 황호숙 씨가 받더라고. ‘문인협회 총회에 오시면 만나실 수 있다, ‘협회 가입하실 거냐고 물어요. ‘하죠그랬지.”

두 잔째 막걸리를 비우자 정 시인은 시 공부를 시작하게 됐던 솔직한(!) 마음을 실토했다.

시 공부 모임이 있으니까 나가보라는 거여. 내 생각에 시라고 하면 정년퇴직한 남자들, 나이 드신 어른들이 시를 허지 하고, 인자 할망구가 헤헤헤, 거기에 가봤어. 노크하고 들어간 게 오~~ 이쁜 젊은 각시들만 있어. 내 또래 영감님들은 한 명도 없네. 헤헤헤.”

할아버지를 만나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시 공부를 시작했다는 고백에 정 시인과 일행은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정 시인은 시를 쓰는 게 여전히 어렵다면서 아직도 맞춤법은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책을 많이 읽었어도 요즘말로 시를 쓰려면 어려워요. 일정 때 학교에 조선어 수업이라고 1주일에 한 번인가 들었는데 가르치는 둥 마는 둥 몰라. 우리말을 학교에서 배운 게 없어.”

정 시인은 그동안 쓴 시가 한 백여 편 되는데 이것도 묶어서 해 봐야지라면서 두 번째 시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즐거운 대화는 92세 소녀감성 시인 특유의 웃음소리로 마무리됐다.

나를 국수 멕이고 막걸리 마시게 항 게 됐어요(만족해요)? (일동 웃음) 요 며칠 동안 시를 쓴다고 스트레스 받았는데 오늘 풀어 부렀네. 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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