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27) 명당과 충효의 고장 인계 갑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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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27) 명당과 충효의 고장 인계 갑동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5.1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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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동리(甲洞里)는 인계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원래는 호계면 갑동리와 호계리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두 지역을 합해 갑동리로 개칭하고 인계면에 소속시켰다. 2021427일 기준 갑동마을 인구는 25가구, 45(남자 25, 여자 20)이고, 호계마을은 85가구, 153(남자 72, 여자 83)이다.

 

갑동마을

 

갑동(甲洞)마을은 마을이 갑사독서(甲士讀書) 형상으로, 갑옷 입은 무사가 책을 읽는 형상이라 하여 갑옷 갑자를 써서 갑동(甲洞)이라 했다 한다. 조선 전기 소씨(蘇氏) 등이 세거하다 청주 한씨(淸州韓氏) 세거지로 변했다. 갑동마을은 순창 대표 명당 중 한 곳으로 꼽히는 마을이다.

주위 고인돌 등으로 미루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2003순창문화 유적분포 지도제작을 위해 전북대학교박물관 주관으로 지표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때 갑동마을 동편 밭, 갑동앞들이라 칭해진 밭, 서편 마곡제 동편 일대, 마을회관 동편 밭 등지에서 삼한삼국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토기 구연부 및 동체부편이 수습되었다.

갑동마을 전경
갑동마을 전경

 

호계마을

 

호계(虎溪)마을은 원래 응동마을이라 불렀다. 꿩이 날아든 것을 보고 쫒아온 매 형상이기에 응동(鷹洞)이라 했다. 마을 뒷산에 매바위가 있으며 마을이 날개를 펴고 날아드는 매를 닮은 형국이다. 조선 초기까지는 함안 조씨(咸安趙氏)가 대중을 이루고 살았으나 조선 초기 평택 임씨(平澤林氏)가 이 마을에 우거(寓居)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호계마을 전경
호계마을 전경

 

호계사

 

호계사(虎溪祠)는 조선 건국을 끝까지 부정하고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킨 두문동 선비들의 상징 임선미(林先味林先味1337~1394)의 절의를 추모해 배향(配享)한 사우(祠宇).

임선미는 본관이 순창(淳昌), 자는 양대(養大), 호는 두문제(杜門齊) 또는 휴암(休庵)이다. 그는 고려 말 태학생(후일 태학사)으로서 고려가 망하자 조선 왕조에 협력을 거부하고 조의생(曺義生) 등과 함께 만수산에 입산해 은거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두문동을 포위한 채 밖으로 나오라고 강요했지만, 선비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이성계는 두문동에 불을 놓게 했다. 하지만 임선미(林先味), 조의생(曺義生), 그리고 맹()씨 등 젊은 선비들은 물러서지 않고 무너진 고려와 운명을 함께했다. 그들이 은거한 만수산 골짜기를 두문동이라 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단어의 근원이 되었다.

두문동 선비들에 관한 이야기는 엄격히 금지되고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공식 언급된 것은 그들이 두문동에서 순절한 지 360여년이 지난 1740(영조 16) 91일이다. 영조가 개경에서 출발해 가마를 타고 제릉으로 가면서 부조현의 유래를 듣고서 고려의 충신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勝國忠臣勉繼世)”는 칠언시를 내리면서 두문동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다. 이후 영조 16(1751) 1021일 두문동 72현을 기리는 첫 제사를 지냈고, 정조 7(1783)에는 왕명으로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했다. 1868(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자 후손과 유림들은 개풍군 만수산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전남 장성군 만수산(萬壽山) 기슭에 경현사(景賢祠)를 세워서 향사했다. 일제강점기에 훼철되자, 후손 종가에서 그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가 1940년 후손과 순창군 유림의 발의로 임선미의 충절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호계마을 바로 왼쪽 산자락에 호계사를 건립했다.

임선미를 순창인이라 한 것은 그의 아버지인 임중연(林仲沇)이 충숙왕 때 밀직부사 지밀직사사에 이어 왕을 호종(扈從)해 원()나라에 다녀온 뒤 순창군(淳昌君)에 봉해져 첨의찬성사에 이르자 그를 파시조로 순창관(淳昌貫) 순창임씨로 했기 때문이다.

임선미는 슬하에 용배(用培)용달(用達)용계(用烓) 3형제를 두었다. 두문동 참사가 있은 후 첫째 용배와 셋째 용계는 순창으로 내려왔고, 둘째 용달은 개성에 남았다. 훗날 용배의 장손 치지(致之)는 화순 오씨(吳氏)와 혼인해 화순에 세거지를 이뤘고, 순창은 둘째 향()의 손이 주로 세거를 이루고 있다.

호계사
호계사

 

호계마을 효열 비각

 

갑동리 효열 비각(甲洞里孝烈碑閣)은 임용진(林容鎭)의 처 열부(烈婦) 대구 배씨(大邱裵氏)와 아들 효자 임종우(林宗祐)의 효열을 기린 정려각이다. 호계마을 동쪽 길가에 있다. 1890년에 세운 뒤 1976년 보수를 거쳐 1990년에 다시 건립했다.

두문동 선비 임선미(林先味)15세 후손인 임용진의 처 대구 배씨는 배윤복(裵胤福)의 딸이다. 배 씨는 나이 16세에 시집와 시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남편에게 부도(婦道)를 지킴이 남에게 귀감이 되었다. 어느 해 남편이 불치병에 걸리자, 배씨는 매일같이 남편 대신 자기를 죽게 해 달라고 신령에게 빌었다. 남편이 위급한 상황에 이르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3일간 더 살게 했지만 결국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배씨 또한 남편을 따라 죽으려 했으나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며 인고의 세월을 살았다.

아들 임종우는 효자였다. 어머니 배 씨가 병환에 신음하며 겨울에 생선이 먹고 싶다하자 두꺼운 얼음을 깨어 선어를 잡아 대접하니 마을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했다고 한다. 1890(고종 27) 2월 조정에서 두 사람에게 정려를 내려 정려각을 건립했다.

호계마을 효열 비각
호계마을 효열 비각

 

갑동마을 청주 한씨 입향조 설화

 

갑동마을 청주 한씨는 숙종(肅宗) 연간에 정읍 고부에서 건너온 영회재(永懷齋) 한태장(韓泰章)이 정착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청주 한씨 안양공 종손의 8대손 한태장(韓泰章)은 정읍 고부에서 세거해 오던 중 인계면 중산리 남원 양씨 준기에게로 시집 온 매씨를 따라와 매형 집에서 중산서당(인계 지산리)을 다니며 수학했다. 숙종 때 성균관 생원에 급제해 고향 정읍으로 가던 도중 갑동마을 뒷동산 소나무 밑에서 잠시 쉬는데 잠이 들었다. 꿈에 한 노인이 말하기를 이곳이 갑사독사(甲士讀書)의 길지이니 이 마을에서 살도록 하라하였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에서 우거하게 되었다. 마을 끝자락에 입향조 한태장을 모신 영회재(永懷齋)가 있다.

그 후 아들 지산(芝山) 한치명(韓致明)이 성균관 진사에 급제해 청주 한씨 집성촌으로 터전을 굳히게 되었다. 한치명은 1760년에 편찬한 순창군 최초 군지 옥천군지서문을 썼고, 편찬 주역을 맡았다.

영회재
영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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