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역사(23)광개토태왕릉 비문 해독의 쟁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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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역사(23)광개토태왕릉 비문 해독의 쟁점은 무엇인가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6.1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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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수왕이 아버지 업적을 기리기 위해 414년에 압록강 중류 지안(국내성, 현재 중국 지린성)에 세운 광개토태왕릉비는 고구려 멸망 뒤 오래 동안 잊혀졌다. 국경 너머 이 지역을 간혹 왕래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 비를 과거 금나라 황제 유적쯤으로 여겼다. 


능비 존재가 정식으로 청나라 조정에 보고된 것은 1880년 무렵 이 지역을 개간하던 농부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비문 전체를 판독해 고구려 광개토태왕 능비라는 사실을 최초로 밝힌 것은 일제가 한반도 침략을 노골화하던 시기에 일본 학자들이었다. 광개토태왕릉비는 오늘날 한ㆍ중ㆍ일 역사학자 사이에 논쟁거리 중 하나가 되고 있다. 


비문에서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은 신묘년 관련 기술 부분인 ‘왜이신묘년래도해’ 여덟 자다. 그 원문은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이다. 


1883년 당시 일본군 중위였던 사코우 가게노부(酒勾景信)는 지안 지역에서 광개토태왕비를 발견하고 그 탁본을 일본에 반입했다. 일본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수년간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이 해석하며 크게 흥분했다. 일본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왜가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의 백제, □□(가야), 신라를 격파해 신민(신하 된 백성)으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 한반도 남부 지배권을 두고 북방의 강자 고구려와 대립할 정도의 세력이었다고 주장했다. 광개토태왕비가 4세기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 즉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일본측 연구를 반박하는 한국 학자들의 연구도 이뤄졌다. 그런데 신묘년조 부분의 내용은 신묘년(391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영락 6년(396년)부터 14년(404년)까지 사이에 이루어진 태왕의 남진정책 명분과 성과를 집약해 기술한 부분이다.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능비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는 어디까지나 왜가 아니라 고구려가 돼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고구려를 주어로 놓고 “백제와 신라는 옛적에는 우리의 속민이었고 이전부터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백제-가야의 편에 서서)왔기 때문에 (고구려는)바다(강화만)를 건너 백제를 격파했다. 또 신라를 …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읽는 것이 맞다. 이렇게 읽어야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책들의 서술 내용과 부합된다. 


당시 왜는 북규수에 있던 왜로 일본 전체를 통일한 강력한 세력도 아니었으며, 백제나 가야 계통 이주민이나 후예들이 주도하던 나라였다는 것은 그 일대에서 나오는 유적ㆍ유물ㆍ지명 자료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림재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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