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29) 팔덕 장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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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29) 팔덕 장안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6.1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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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과 장수, 도라지로 유명한 팔덕 장안리
장안리는 팔덕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평창ㆍ옥정(玉井) 마을을 장안리로 통합했다. 뒤로는 광덕산을 주산으로 하고 서남쪽으로 담양군 금성면을 도계로, 강천산을 북으로 하여 분지를 이루고 있다. 2021년 5월 27일 기준 인구는 55가구, 103(남자 48, 여자 55)명이다.
장안리는 팔덕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평창ㆍ옥정(玉井) 마을을 장안리로 통합했다. 뒤로는 광덕산을 주산으로 하고 서남쪽으로 담양군 금성면을 도계로, 강천산을 북으로 하여 분지를 이루고 있다. 2021년 5월 27일 기준 인구는 55가구, 103(남자 48, 여자 55)명이다.

순창 대표 명당 마을 
임진왜란 당시 군량미를 보관하던 군창이 있었다고 하여 평창으로 불리다가 장안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 1500년 전에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500여 년 전에 장수 황씨가 터를 잡고 16대를 살았다고도 하며, 마을 청룡등에 황씨 고분이 많이 남아 있다. 300여 년 전에는 경주 김씨와 달성 하씨가 들어와 터를 잡았다. 이어서 남원 윤씨와 울산 김씨가 들어와 주막이 5군데나 있는 큰 마을로 번창했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었던 고 양상화에 따르면 옛 선현들은 순창에서 현천에 살기 좋은 곳으로 순창읍 남산ㆍ동계 구미ㆍ금과 고례ㆍ인계 갑동 마을을 꼽았고, 후천에 살기 좋은 곳으로는 일 평창(장안리), 이 배위개, 삼 연산이라고 했다 한다. 

 

도라지마을

장안마을은 지난 2005년부터 3년간 농촌건강장수마을로 선정돼 마을에서 재배하고 있는 도라지를 이용한 테마로 도라지정과ㆍ도라지고추장ㆍ도라지분말ㆍ도라지즙 등을 생산해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한국방송(KBS) 〈6시 내 고향〉에 방송된 후 한때 도라지정과와 도라지 고추장 주문이 밀려 물량이 딸리거나 일손이 모자라 주문량을 제때 소화하지 못할 정도였단다. 농촌마을로는 드물게 100여 명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장안마을은 전국 100대 장수마을 중 하나다.

 

강천산 순환형 탐방로

 

장안리는 호남정맥 등산로 일부가 이곳을 거쳐 가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관광 마을로 발돋움해 펜션과 민박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순창군은 지난 2013년 장안마을~강천산 삼림욕장 구간에 원주목 계단ㆍ전망대ㆍ팔각정 등을 설치한 ‘강천산 순환형 탐방로’를 완공했다. 


옥호봉 등산로인 1공구는 탐방로를 조성하고 목재판 계단을 설치했다. 산림욕장 앞 2공구도 탐방로 조성 및 조경 식재 등을 추진했으며 장안마을에서부터 산림욕장까지 구간인 3공구는 탐방로를 조성하고, 원주목 계단ㆍ전망대ㆍ팔각정 등을 설치했다. 3공구 구간에 설치된 팔각정은 장안마을 뒤에 있는 광덕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장안마을 주민들이 ‘천제각’이라 이름 짓고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기원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돌탑

장안리 돌탑은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 삼거리에 있다. 마을 터의 지기를 눌러 줄 목적으로 조성해 놓은 압승형 돌탑이다. 돌탑 형태는 돔형으로 만들어졌고, 돌탑 상부 중앙에 1기의 입석을 세워 놓았다.

 

마을 어귀에 있으며,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마을 사람들은 느티나무가 마을의 화를 막아 주는 방패 구실을 하기 때문에 항상 마을이 평온하다고 믿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 뒷산 나무를 할머니 당산이라 부르고, 마을 앞 한가운데에 있는 느티나무를 할아버지 당산이라 부른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무병과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당산제를 지낸다. 이를 ‘천룡제’, ‘산신제’ 등이라고도 한다. 

 

김한기ㆍ전주이씨 효자 효부 정려

개항기 효자ㆍ효부였던 김한기(金漢基)와 그의 처 숙인(淑人) 전주 이씨(全州李氏)를 기리는 정려다. 김한기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정려각은 1874(고종 11)년 8월에 세워졌다. 마을회관 뒤에 있으며,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돌흙 담으로 둘러쳐 있다.

 

마을 뒤 야산에 연대와 소유주를 알 수 없지만 장군묘와 말무덤으로 불리는 묘와 묘비가 있다. 구전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묘비에는 주변 삼십 리 이내 땅은 모두 묘주 소유라는 사실이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묘비 글자를 갈아버리고 비를 물이 가득한 논에 묻어버렸다. 그 후 매일 밤 주민들 꿈에 장군이 나타나 “내 비를 내놓으라”고 호통 쳤고, 이에 마을사람들은 비를 다시 묘 앞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구전되는 내용처럼 글자를 갈아서인지,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마모돼서인지 어느 시대 누구의 묘인지를 전혀 알 수 없다. 마을사람들은 아마도 금성산성(백제 또는 고려 때 축성)을 지킨 장군의 묘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묘비 좌대의 연꽃무늬와 투구 모양의 옥개석으로 보아 고려 때 장군이었던 사람의 비인 것으로 보고 있다.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된 것으로 보인다. 장군묘 앞에 말무덤으로 보이는 무덤이 있는데 묘주 소장품을 매장한 것으로 보이는 구조물이 있다. 구조물 앞 벽이 완벽하게 제거되었다. 
장안리 주민들과 재경 장안 향우회 일동, 고 양상화 등이 1995(단기 4328)년 3월 8일 복원비를 묘 앞에 세워놓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관리가 안 돼 누운 채 방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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