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이야기(1)순창과 흥선 대원군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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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이야기(1)순창과 흥선 대원군의 인연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7.14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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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옥총부〉 

공자는 “기술(記述)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述而不作ㆍ술이부작)”고 말했다. 이 말이 동양에서는 역사학의 기본자세로 계승되었지만, 꼭 객관적이고 비편향적인 역사 서술이 되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우리에게 유리한 것’을 부각해 민족이나 집단의 자존감과 자부심을 고취하려는 경향이 있다. 요즘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지역사 서술도 그러하다. 

객관성을 추구했으나 객관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 처음부터 작정하고 근거 없는 주장을 펼치는 것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순창,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서〉는 과장되고 왜곡된 정보를 수정하고 역사적으로 검증된 객관적 사실 위주로 숨겨진 순창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9세기 후반,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고 외세의 야욕을 한꺼번에 해결해야 했던 흥선 대원군 이하응(1821~1898ㆍ섭정기 1864~1873). 


한편에서는 보수적인 국수주의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순조-헌종-철종-대원군-고종(민비)’으로 이어진 19세기 조선 권력자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자주적인 개혁 정치가였다. 그리고 우리 고장 순창과 인연 깊은 인물이기도 하다.

권력자이자 예술가였던 ‘흥선’

흥선대원군은 19세기 후반 조선을 주도한 권력자이지만 판소리 후원자였고, 정상급 수준의 예술가였다.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으로 서도와 묵란(먹으로만 그린 난초 그림)을 배웠는데, 특히 난초 그림에서 청출어람을 이뤘다. 이 때문에 그의 호인 석파(石坡)와 난(蘭)을 결합한 '석파란(石坡蘭)'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평론가들은 “석파난은 가늘고도 여리게 끊어질 듯 이어지는 특징을 지닌다”고 말한다. 72세 때 회혼(回婚) 기념으로 제작한 석란도(石蘭圖) 12폭 병풍은 서울시유형문화재 제142호이다. 동양 미술사상 묵란을 병풍이라는 큰 화면에 제작한 것도 흥선대원군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그린 난초 그림은 가짜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이것은 안동김씨 집권기 그가 어렵게 살던 시절과 관련이 있다. 그의 난초 그림이 이름을 떨치자 찾는 이가 많았다. 주문에 모두 응할 시간이 부족했을 테고, 그래서 그를 따르는 난초 잘 치는 수준급 서화가들이 대신 그려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한다. 이렇게 다른 이들이 그렸으나 글씨와 낙관은 대원군이 직접 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훗날 위작 시비가 많았고, 위작까지 더해져 '석파란'에 위작이 많다는 말이 떠돈 것이다. 이러한 위작 시비는 그의 난초 그림이 그만치 매력이 있고 유명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들었던 대원군 묵란 병풍

필자는 평택임씨 33세손이자 순창관(중시조 임중연) 20세손이다. 어린 시절 부모와 친척 어르신들에게 자주 들은 이야기가 있다. 고조부가 대원군에게 묵란 병풍을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임기열(1811~1896) 고조부는 순창관 16세손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ㆍ경희궁 위장ㆍ호조참판을 역임했다. 모두 종2품 품계이다. 아마도 대원군이 안동김씨 세력에게 탄압 받던 시절, 물심양면으로 편의를 제공하고 그 답례로 묵란을 하사받아 병풍을 제작한 것 같다.

 
그런데 해방 이후 문중 재산을 관리하던 한 친척이 생활이 어려워지자 남원 운봉에 사는 부자에게 묵란 병풍을 몰래 팔아버렸다고 한다. 그 친척은 멍석말이를 당했고, 병풍은 세월이 한참 흐른 후인 1960년대에 고 임차주(순창관 19세) 국회의원이 되찾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과 박유전 명창

흥선대원군이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눌려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살아남기 위해 파락호(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 자손이었으나 집안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로서 ‘상갓집 개’라는 비칭으로까지 불리면서 파격적으로 행동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흥선대원군은 어느 날 남사당패를 따라나섰다가 전주에 들러 백이방(白吏房ㆍ백성환 명창의 증조부) 집에서 며칠 동안 묵었다. 그때가 마침 단오절이어서 대원군은 놀이터(지금의 덕진공원)에 갔다가 거기서 가왕 송흥록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송흥록은 불우한 왕족이었던 대원군의 신세를 동정해 당일 받았던 돈을 모두 대원군에서 주었다. 


백이방, 송흥록과의 인연으로 대원군은 섭정 후, 1864년 전라감사에게 “단오절 경창대회를 감영에서 관장하고 거기서 장원한 명창은 상경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전주감영에서는 백이방의 의견을 들어 경창대회 명칭을 ‘전주통인청대사습’으로 확정했다. 전주 통인청대사습은 조선 후기 판소리 광대가 명창 반열에 오르도록 하는 등용문 역할을 했다. 


서편제 창시자였던 복흥 출신 박유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5세 때 전주 통인청 대사습에 나가 <심청가>로 장원을 차지해 일약 유명 소리꾼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라감사 주선으로 상경해 흥선대원군을 만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운현궁 품평회에서 박유전의 빼어난 소리에 흡족해 하며 “박유전 소리가 강산(江山)에서 천하제일”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호 ‘강산(江山)’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운현궁 사랑채에 기거하며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 어린 시절 사고로 한쪽 눈을 잃은 그는 한쪽 눈을 가릴 수 있는 ‘오수경(烏水鏡ㆍ둥그런 검은 안경)’과 ‘금토시(최고급 팔목가리개)’을 하사받고, 무과 선달 첩지까지 받았다. 

판소리 좌상층 안민영

판소리 융성기는 흥선대원군 섭정기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데, 이것은 흥선대원군의 역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판소리에 열광했던 귀명창이었다. 전주에서 선발된 최고 소리꾼들을 운현궁으로 불러 대접하며, 판소리 좌상객 앞에서 품평회 자리를 마련했다. 


‘판소리 좌상객’이란 품평회 자리에서 상좌에 앉아 연행물을 감상ㆍ비평하고, 일정한 경제적 지원도 해주는 감상자층이다. 양반 또는 신흥 부유층인 이들은 소리꾼들에게 판소리 사설과 음악에 대해 비판적으로 지적했고, 이와 같은 지적에 대해 소리꾼들이 수용ㆍ대응하면서 판소리 창곡과 사설이 변화하게 된 것이다. 


운현궁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귀명창들이야말로 ‘최고 좌상객’이었다. 그 중 안민영의 경우는 좌상객에서 특별한 위상을 차지한다. 그는 가객이자 풍류를 즐길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인계층 예술애호가였다. 스승인 박효관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가곡(시조)집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해 근세 시조문학을 총결산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또 그의 개인 가집 <금옥총부>에는 시조 작품뿐 아니라 각 시조의 후기(後記)에서 좌상객의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가 다수 등장한다. 순

창기생 봉심

안민영은 젊어서부터 전국의 재주 있는 예인을 찾아다니는 유람을 해왔다. 그가 소개한 예술적 능력이 탁월한 기녀들은 운현궁에 머물면서 대원군을 후원자로 삼아 예술활동을 했다. 〈금옥총부〉에는 이런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순창에서 활동하던 기녀 이야기도 실려 있다. 


 “사람 됨됨이가 순숙(淳淑)해 자못 부인(夫人)의 모습을 지니면서도 가무에 익숙하다”며 순창 기녀 봉심(鳳心)을 대원군에게 소개한다. 그러자 “대원군이 그녀를 사랑해 신부(新婦)라고 불렀다. 대원군은 가무악에 능한 봉심을 곁에 두고 그녀의 기예에 대한 후원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운현궁 풍류무대와 박유전

<금옥총부〉에 실린 시조 178번은 안민영이 스승 박효관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모습을 그려낸 가곡인데, 박유전 명창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안민영 예단에서 판소리 <적벽가>를 부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저녁부터 시작한 길고 긴 <적벽가>를 마치자 새벽에 이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풍류 자리에 초대된 판소리 명창은 박유전ㆍ손만길 전상국 등인데, 이 중 운현궁 공연에서 <적벽가>를 불렀던 명창은 박유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 공연에 참여하고 있는 세 명창 가운데, 손만길과 전상국은 안민영의 이 부기에서만 확인되고, 판소리사에서는 특별히 존재가 없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박유전은 이미 <적벽가>와 <심청가>로 이름이 날리고 있던 명창이었다. 

유등 ‘대원군 낚시터’

유등면 섬진강변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야인 시절 이곳 주변에 들러 낚시했다는, ‘대원군 낚시터’라 불리는 낚시터 상석이 있다. 대원군은 정말 이곳에 들렀을까?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


남한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이라는 섬진강 주변은 풍광이 빼어난 곳도 많고 전해오는 이야기도 많다. 조선시대의 풍류객 백호 임제도 외가(곡성)에서 멀지 않은 이곳을 자주 들렀다 하며, 어초정과 고뱅이 유원지는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인근 지역 유학자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고 시와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흥선 대원군도 야인 시절 이곳을 거쳐 운봉에 살던 송흥록 명창을 찾아가지는 않았을까? 

※ 유민형 박사의〈판소리 패트론으로서의 대원군과 박유전 적벽가의 변모〉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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