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여름 강천산을 오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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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여름 강천산을 오르며
  • 신형식 원장
  • 승인 2021.07.2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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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원장

무더운 여름날, 나는 휴식을 겸해 산을 찾곤 한다. 산행(山行)에서 얻는 즐거움은 남다르다. 혼자 걷는 산길도 좋지만 마음 맞는 친구와의 동행은 더없이 좋다. 독행(獨行)의 고요함이 싫어서가 아니다. 나는 호젓한 길을 혼자 걷는 고독보다는 함께 걷는 다정을 즐기는 편이다. 그러나 동행에서 시작한 산행도 어느 순간 독행으로 깊어지다가 다시 동행으로 돌아온다.


여름 숲이 매력적인 강천산에서 산행의 진면목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이름난 산들이 그렇듯 강천산에도 강천사라는 아름다운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경우 산 초입부터 산사까지는 넓고 평탄한 길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길이라면 좋은 사람들과의 동행이 더없이 즐겁다. 푸르게 얹힌 숲과 그 숲 그늘을 흘러가는 계곡물 그리고 너나없이 넉넉한 표정으로 걷는 사람들. 이곳에서는 자박자박 흘러가는 시간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강천사를 지나고 등산로를 찾아들면 길이 가파르고 좁아진다. 자연스럽게 동행했던 사람들은 어깨를 물려 앞뒤로 걷게 되고, 두런거렸던 대화도 차츰 줄어든다. 그때까지가 서로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동행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독행이 시작된 것이다. 좁은 산길 따라 걷노라면 저절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심행(心行)으로 바뀐 것이다. 좋은 기억들 속에 간간이 섞여 있는 불편한 순간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지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은 현재를 바라보게 하고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게 한다. 과거를 통해 미래의 삶에 대한 남다른 각오를 다져보는 것이다.


혹시 모를 안전사고를 피하기 위해 길에 집중해야 하는 무념무상의 순간도, 언덕과 바윗길이 고스란히 마음의 길이 되는 경험도 이때 이루어진다. 마음으로 걷는 일은 몸으로 걷는 일보다 즐겁다. 산행은 이렇게 함께 걸으면서 혼자 걷는 역설의 즐거움을 준다. 묵묵히 걸으면서 이런 생각을 곱씹다보면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 나온 시간의 수수께끼야말로 통찰력 가득한 화두(話頭)라는 걸 느끼게 된다.


“세 형제가 한 집에 살고 있어. 그들은 정말 다르게 생겼어. 그런데도 구별해서 보려고 하면, 하나는 다른 둘과 똑같아 보이는 거야. 첫째는 없어.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참이야. 둘째도 없어. 벌써 집을 나갔지. 셋 가운데 막내, 셋째만 있어. 셋째가 없으면, 다른 두 형도 있을 수 없으니까.”


짐작했겠지만, 첫째는 미래의 시간이고 둘째는 과거의 시간이다. 중요한 건 셋째인 현재의 시간이다. 현재가 없으면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수수께끼에 따르면 산행하며 피어나는 상념은 현재 시점에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는 일이 된다. 그래서일까? 나는 고향인 순창에 올 때마다 내 삶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곤 한다. 세 가지 시간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때로 과학의 바깥에서 더 아름답고 가치 있게 펼쳐질 때가 있다. 내 경우에는 순창에서의 시간이 그렇다.


고된 산행을 마치고 주차장에서 돌아보면 강천산은 깊은 침묵으로 울창하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 숲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이 동행이자 독행 그리고 심행의 흔적으로 새겨져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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