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이야기(2) 군민의 애환 달랜 ‘순창 극장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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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이야기(2) 군민의 애환 달랜 ‘순창 극장문화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8.0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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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은 연극이나 음악 등을 공연하거나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무대와 객석 등을 설치한 시설이다. 순창 극장문화 역사는 1958년부터 1967년 가을까지 임병선 씨가 운영한 제1기, 1967년 말부터 임흥길 씨가 운영한 제2기, 순창극장과 대한극장(현대극장)이 경쟁하던 제3기로 나눌 수 있다. 《순창군지》(1982)와 ‘디지털순창문화대전’ 등에 잘못 기록된 부분이 많아 이를 바로잡으면서 순창 극장문화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순창극장 전경

순창극장 개관


순창군 최초의 상설 영화관은 1958년 8월 15일 개관한 순창극장이다. 당시 호남지역 군 단위 극장 대부분이 공회당에서 출발했던 것처럼, 순창극장도 임차주 국회의원 시절에 지은 공회당 건물을 임병선 씨가 임대해 극장 허가를 받았다. 순창 본정통으로 불리던 군청-등기소-경찰서-순창면사무소 바로 옆인 순창읍 순화리 299번지, 지금의 녹원식당 자리다. 


극장은 2층 건물이었고 관람석 구조는 1층과 2층이 분리되었다. 성인 7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고, 좌석은 1인석이 아니라 교회 예배용 의자처럼 여러 사람이 함께 앉는 형태였다. 그래서 초등학생 단체관람 때는 전교생 2000명이 넘는 순창초등학교 학생 전원을 수용할 수도 있었다. 


개봉작은 김진규ㆍ김지미 주연 〈별아 내 가슴에〉였다. 유리창으로 된 나무문틀이 넘어질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렸다. 

필름 배급과 영화 홍보


1950년대 후반, 국산영화 관람객 입장세 면세와 같은 일련의 조치는 영화를 ‘땅 짚고 헤엄치는’ 돈벌이로 인식하게 했다. 이에 영화 제작 수가 늘어났고 극장 수도 증가했다. 필름 유통방식도 각 지역 배급사나 흥행사가 극장과 거래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지역별 상권은 서울 개봉관을 제외한 전국 6개 권역으로 나뉘었고 각 지역 배급사들은 경매입찰을 해 영화판매권을 사들였다. 호남지역 필름 상영 순서는 광주ㆍ전주 등 대도시에서 먼저 상영된 다음 군 읍ㆍ면 단위 순서로 돌았다. 


순창극장은 광주와 전주 소재 영화배급사에서 영화를 배급 받았다. 박남국(박남재 화백 동생) 씨가 전주에서 영화배급사 일을 보면서 순창극장 영업부장을 겸임했고, 임병선 사장은 총무부장이자 조카사위인 문지회 씨와 함께 광주 소재 배급사에 들러 시사회를 보면서 흥행에 성공할 필름을 골랐다. 극장과 배급사의 판권 비율은 5:5제였다. 


영화는 주간과 야간 각각 1회 상영했는데 한 작품을 1∼3일 정도 상영했고, 흥행작의 경우는 3일 이상 가는 경우도 있었다. 순창극장은 관객이 많이 몰리는 추석ㆍ설과 주말, 5일장이 서는 날뿐만 아니라 매월 보름날 상영할 작품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왜냐하면 낮보다는 저녁 손님이 많았는데, 가로등이 없던 시절 보름날은 순창읍 교외지역이나 면 단위 주민도 밤길 귀가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화 홍보 수단은 극장간판과 영화포스터였다. 간판장이가 그린 극장간판은 극장 정면 위 2층에 걸렸다. 관객들은 간판에 그려진 배우가 “닮았네”, “안 닮았네” 수다를 떨며 극장에 들어서곤 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읍내 곳곳에는 영화포스터로 도배가 되었다. 


극장기도와 영사기사 등 극장 직원들은 며칠 간격으로 읍 외곽 마을과 면 지역을 다니면서 영화나 쇼를 홍보했다. 리어카나 삼륜차를 타고 각 지역을 돌면서 포스터를 붙이고, 스피커로 상영될 영화를 알렸다. 

흑백영화 10원, 칼라영화 20원


관람료는 1966년 기준으로 흑백영화는 10원, 총천연색영화 20원, 학생단체관람 5원이었다. 극장쇼와 여성국극은 30원이었다. 당시 순창-광주 시외버스요금이 33원, 순창-전주는 68원 하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순창 영화팬들은 자막을 읽어야 하는 외국영화보다는 한국영화를 선호했다. 대체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멜로물이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당시 흥행 영화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ㆍ〈길은 멀어도〉ㆍ〈맨발의 청춘〉ㆍ〈남과 북〉ㆍ〈빨간 마후라〉ㆍ〈옥이엄마〉ㆍ〈홍콩의 왼손잡이〉ㆍ〈초우〉ㆍ〈만추〉 등이 있었다. 이윤복의 수기를 영화화한 흑백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11개 읍ㆍ면 초ㆍ중ㆍ고 학생 모두 단체관람한 관계로 14일 동안이나 상영되었고, 한국 공포영화 초기 대표작 〈살인마〉도 1주일 넘게 상영되었다.


당시 영화 상영은 필름상영이었다. 20분 분량의 35미리 필름 6권이 필름 캔에 담겨 전국 상영관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개봉관에서 재개봉관으로 쭉 내려오다 보니 순창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할 때 쯤 되면 필름에 ‘기스’(흠)가 나서 화면에 ‘비’가 내리기도 했고, 가끔 필름이 끊어져 상영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영화가 중단되면 일부 관객들은 “영화비 물어내라”고 소리 지르기도 했다.

여성 배우들만 출연한 ‘여성국극’


여성국극(女性國劇)은 여성 배우들만 출연하는 창극의 한 갈래다. 1950년대가 전성기였지만 1960년대에도 인기는 당분간 지속되었다. 인기 작품으로는 〈햇님달님〉ㆍ〈무영탑〉ㆍ〈공주궁의 비밀〉ㆍ<상사천리(相思千里)>ㆍ〈설무랑의 비련〉 등이 있다. 


여성국극은 삼한시대나 삼국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화려한 분장과 의상, 우아하면서도 애절한 소리와 춤, 감칠맛 나는 기악 반주, 남성역 배우의 걸출한 목소리와 칼싸움 연기 등 대중예술로서의 여러 가지 면을 갖추었다. 


1960년대 순창에서 여성국극의 인기는 대단했다. 공연이 있는 날이면 단원들이 묵고 있는 숙소 남창여관에서 극장까지 꼬마들까지 신기한 듯 일행을 졸졸 따라 다녔고, 극장 앞에는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여성국극 스타였던 임춘앵ㆍ김진진ㆍ김진경ㆍ조금앵ㆍ박미숙ㆍ이군자 등은 순창극장을 여러 번 찾았다. 임춘앵이 여성국극 최고 스타이자 최고의 남성역 배우였다면 김진진은 최고의 여성역 주인공이었다. 이군자는 여성국극 마지막 스타라 할 만하다. 성대결절로 인해 가창력은 떨어졌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와 남성 같은 분장술, 그리고 춤 솜씨가 압권이었다. 

1960년대 극장쇼


티브이(TV) 보급률이 낮던 1960∼70년대 서민들이 가수와 영화배우를 직접 볼 수 있는 무대는 극장쇼가 유일했다. 극장쇼는 톱가수나 유명배우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밖의 무명가수ㆍ코미디언ㆍ무희 등으로 구성된 쇼였다. 


‘쇼’가 있는 날은 온 동네가 술렁거렸고 극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쇼단 악기 연주자들은 공연 1시간 전부터 극장 옥상에 올라가 나팔ㆍ트럼펫ㆍ트럼본 등을 불며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막이 오르고 악단이 연주하는 팡파르가 귀청을 때리며 공연 시작을 알리면 휘황찬란한 조명, 연예인들의 반짝이는 화려한 의상, 거기에 무희들의 아찔한 스트립쇼까지 더해져 극장 안 열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쇼는 낮 1시경과 밤 7시, 1일 2회 진행됐다. 극장과 쇼 단체 수익 배분은 3:7이었지만 그래도 극장측은 수익면에서 남는 장사였다.


1967년 이전 순창극장에서 공연한 대표 가수들로는 당시 ‘극장쇼 스타들’로 불린 〈뜨거운 안녕〉의 자니 리, 〈허무한 마음〉의 정원, 그리고 트위스트 김이 있다. 그들은 파격적인 의상에 〈왓 아이 세이〉ㆍ〈언체인 마이 하트〉ㆍ〈하운드독〉과 같은 팝송을 마이크를 옆으로 눕히고 다리를 떨며 포효하듯 소리를 내지르는 창법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꼬맹이 시절부터 노래한 혜은이와 하춘화도 1966년 순창극장에서 공연했다. 혜은이는 훤칠한 키에 맘보바지를 입고 “저 산 저 멀리 저 언덕에는 무슨 꽃들이 피어 있을까”로 시작하는 〈소녀의 꿈〉을 멋진 안무와 함께 선보였다. 하춘화는 성인이 된 1975년에도 다시 순창을 방문해 현대극장에서 ‘하춘화쇼’를 공연했다. 


코미디언과 사회자로는 서영춘ㆍ남철ㆍ남성남ㆍ쓰리보이 신선삼ㆍ이대성이 있었고, 무명시절의 이주일도 몇 번 순창극장을 찾았다. 영화배우로는 김석훈ㆍ박노식ㆍ주증녀ㆍ이빈화가 왔었다. 스크린과 가요계를 넘나들며 넘치는 끼를 발산한 남석훈도 무대 위에 섰다. 

순창극장 제2기와 대한(현대)극장


1967년 말부터는 임홍길 씨가 소송 끝에 순창극장을 운영하게 되면서 순창극장 제2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상영된 영화는 〈미워도 다시 한 번〉ㆍ〈팔도강산〉ㆍ〈꼬마 신랑〉ㆍ〈스잔나〉ㆍ〈십계〉ㆍ〈에덴의 동쪽〉 등이 있었고, 1977년 ‘남진쇼’ 공연이 있었다.


1972년 3월 2일에는 대한극장(순창읍 남계리 551-1번지)이 문을 열었다. 광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한영수ㆍ이필옥 부부가 운영한 대한극장은 1ㆍ2층이 이어지고, 1인 좌석 등 500석 규모의 최신식 시설을 갖췄다. 개봉작은 〈어머니 전상서〉(남진ㆍ문희 주연)였다.


1973년 하반기부터는 송명주 씨가 소송 끝에 극장을 인수했고, 현대극장으로 개명해 운영했다. 〈별들의 고향〉ㆍ〈고교 얄개〉ㆍ〈진짜 진짜 잊지마〉ㆍ〈내 이름은 튜니티〉 등을 상영했다. ‘하춘화쇼’(1975년), 여성국극 ‘박미숙과 그 일행’(1977) 공연도 있었다. 


동계에도 극장이 있었다. 우체국 건물 옆에 있던 영민극장이다. 정성균 순창군의회 전 의장 증언에 의하면 동계 영민극장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운영되었다. 동계뿐만 아니라 적성, 남원 대강ㆍ대산, 임실 삼계 등지에서도 사람들이 몰렸다고 한다.


순창지역 극장에서는 영화나 극장쇼 뿐만 아니라 콩쿨대회ㆍ학예발표회 등 각종 행사가 치러지며 지역 문화ㆍ예술 창달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군내 인구 감소, TV 보급과 칼라 TV 등장, 대중오락 다양화 등의 요인으로 순창극장과 현대극장, 동계 영민극장 모두 1980년대 초반 이전 폐업했다. 


순창에서 극장이 사라진 지 30여 년 만인 지난 2015년 10월, ‘천재의 공간 영화산책’(순창읍 남계로 83)이 준공되어 전국 동시개봉 최신 영화를 군민에게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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