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 김교준과 동계 신흥마을 오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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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 김교준과 동계 신흥마을 오산서원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8.11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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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서원

 

경암(敬庵) 김교준(金敎俊ㆍ1883~1944)은 순창 출신 개항기 유학자다. 
일찍이 송시열 9대손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에게 수학했다. 송병선은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친척인 송병준 등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자결했다. 김교준은 “나아가지 말고 물러나 도를 지키라”는 스승의 유지에 따라 1907년 경재(敬齋)를 신축해 제자를 가르치는데 전념했다. 이듬해인 1908년에는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ㆍ1841~1922)에게 나아가 학문에 전념하며 그를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세상에 귀를 먹고 살리라”며 ‘경재’(敬齋)를 귀머거리 농((聾)자가 붙은 ‘농세재’(聾世齋)로 개칭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41년 문도들이 점차 많이 찾아오자, 농세재를 동편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건물을 크게 중건해 후학 교육에 전념했다. 당시 중건한 건물이 바로 동계 신흥마을에 있는 오산서원(鰲山書院)이다. 


그는 절의를 지키며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의로운 선비들에게 항상 조의를 표하는 글을 올렸고, 일제에 저항하는 강직한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는 일제에 항거하는 제자를 두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취조를 당하기도 했다. 제자 중 독립투사 추산(秋山) 김일두(金一斗ㆍ1891∼1955, 동계 추동마을 출신) 일로 경찰이 김교준을 찾았다. “도대체 제자를 어떻게 가르쳤기에 그런 나쁜 놈이 나올 수 있느냐”며 전주경찰서로 끌려가 취조를 당한 것이다. 이후 김교준은 해방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세상을 떠났다. 


 1961년 제자인 황갑주(黃甲周)ㆍ오구영(吳龜泳) 등이 김교준의 시문집 《경암집》을 편집해 간행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전주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김교준의 제자ㆍ후손ㆍ순창 유림은 1972년 오산서원을 오산사(鰲山祠)로 이름을 바꾸고 그곳에 영정을 모셨다. 그 뒤 1984년 사당을 신축해 경현사(景賢祠)로 이름하고 오산사에 있던 김교준을 이안(移安ㆍ신주나 영정 따위를 다른 곳으로 옮김)했다. 1994년에는 오산사 건물을 원래대로 ‘오산서원’으로 환원하고 《오산서원지》(鰲山書院誌)를 발간했다. 


오산서원과 경현사는 순창에서 남원 방면으로 가다가 동계면 쪽 국도 13호선으로 향하다가 합미성 푯말에서 신흥마을로 가면 마을 중앙에 있는 교회를 지나 산 중턱에 있다. 
지난달 30일 동계면사무소 2층 회의실에 동계 신흥마을 주민들과 오산서원 지킴이 동아리 회원들이 모여 오산서원 정비ㆍ복원을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참석자들은 너무 퇴락한 건물이 안타까워 차라리 철거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지만 소중한 유산을 지켜나가자며 여러 의견을 제시했다. 


오산서원은 경암 김교준과 스승 간재 전우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력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역사적 가치와 사연이 있는 문화재를 마을주민만의 힘으로 지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군민의 관심과 지혜로운 대책이 절실하다. 

림재호 기자
ljh5025@opench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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