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30) 풍산 우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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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30) 풍산 우곡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8.1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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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관련 지명, 형상 대표 마을

우곡리는 풍산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조선 전기까지 소실로 불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지내리 일부를 병합해 우곡리가 되었다. 동쪽과 북쪽은 한내리, 서쪽은 죽전리, 남쪽은 전라남도 곡성군 합강리와 접하고 있다. 북동쪽을 제외하고 삼면이 모두 산지로 둘러싸고 있으며, 북동쪽은 우곡천(牛谷川)이 흐른다. 2021617일 기준 인구는 64가구, 116(남자 51, 여자 55)명이다.

소가 엎드린 마을 형세

우곡리(牛谷里)는 마을 앞산 골짜기가 황소처럼 생겼다 하여 소실쇠실우실(牛室)이라 불렀으며, 풍수지리적으로 소가 엎드려 앉아 있는 와우(臥牛) 형국이다. 실제 우곡리에는 동쪽에 소뿔 형상의 산세가 있으며, 그 골짜기를 가리굴이라 부른다.

1872년 지방 지도》〈순창오산면(鰲山面현재 풍산면 동쪽 일대) 우곡(牛谷)’이라는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우곡리는 작은 마을이지만 예전에는 전남 곡성군 옥과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나 있었기에 사람들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다. 교통 요충지이었기에 봇짐꾼들이 넘나들 때 잠시 쉬는 주막이 마을 입구와 고갯마루 2곳에 있었다. 현재의 마을회관은 옛날에 주막집이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 느티나무 건너편 언덕에는 매스게임의 카드섹션처럼 마을 이름 우곡을 나타내는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우곡마을 전경
우곡마을 전경
우곡마을 바람개비
우곡마을 바람개비

 

 

선돌과 와우돌탑

우곡리에는 선돌과 함께 돌탑이 있다. 우곡리에서 선돌과 와우 탑을 함께 세운 것은 와우 형국의 터가 세기 때문에 쇠고삐를 매어 두는 말뚝으로서 선돌을 세우고, 돌탑으로 터를 누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우곡리 선돌과 돌탑은 처음 마을이 조성될 당시에 세운 것으로, 마을 조성 시점에 마을 풍수를 어떻게 적용했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우곡리 선돌은 마을 입구에 있다. 높이 95, 50, 두께 30이다. 마을이 와우 형국이어서 엎드려 있는 소가 일어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소고삐를 매어 놓는 선돌을 마을 앞에 세워 놓은 것이다.

우곡리 돌탑은 마을 모정 옆에 세워져 있다. 예전에 우곡리 마을 부녀자들 기가 세서 그 기를 눌러 주기 위해 돌탑 1기를 세웠다고 한다. 탑을 쌓을 때 장구를 탑 안에 넣고 쌓았으며, 그 후 당산제를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와우탑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마을 수호신 기능을 했던 돌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에 든 도둑이 밤 내내 돌탑만 뱅뱅 돌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원래는 마을 안길에 있었는데,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무렵 마을 안길을 내면서 그 옆으로 조성해 놓았다. 마을 주민들이 관리를 잘못해 탑돌이 유실되었는데, 바로 옆으로 옮기면서 돌탑을 쌓고 시멘트를 발라서 견고하게 만들었으며, 돌탑 위에 바윗돌을 올려놓고 와우탑(臥牛塔)이라는 이름을 새겨 놓았다.

우곡마을 선돌
우곡마을 선돌
와우돌탑
와우돌탑

형제 느티나무

마을 앞에 세 그루 느티나무 형제가 240년이 흐른 지금도 건강하게 서 있다. 그중 한 주가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우곡리 형제느티나무는 질병을 막아준다는 속설이 있다. 병원이 없던 시절, 돌림병이 전국에 창궐할 때도 우곡리 사람들은 당산나무에 금줄을 치고 외지인 출입을 막아 경계하니 무사했다 한다. 그래서 모두 당산나무를 마을 수호신으로 여기고 있다. 신통력을 발휘한 당산나무는 여름이면 주민들을 품 안에 안아 땀방울을 식혀주며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느티나무 위에는 전주이씨 효열려와 전주이공 여광배 죽산안씨라는 비문이 있어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 마음에 효와 절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형제 느티나무
형제 느티나무
전주이씨 효열각과 죽산안씨 비문
전주이씨 효열각과 죽산안씨 비문

석인상

우곡리 석인상은 우곡리 마을회관 옆에 세워져 있다. 본래는 무덤 앞 좌우에 배치해 세워 놓은 문관석과 무관석이었는데,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석인상 2기를 마을 주막 옆에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논두렁에 내팽개쳐져 방치되었다가 다시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석인상 가운데 1기는 원형을 유지하는 데 비해 다른 1기는 얼굴상이 유실된 상태이다. 원형 상태의 석인상은 높이 135, 넓이 34, 두께 26이고, 목이 달아난 석인상은 높이 143, 넓이 32, 두께 29이다.

타 지역에서는 문관석을 마을 미륵으로 섬긴 사례도 있어서 두 석인상을 마을에 처음 조성할 때에는 미륵 대용으로 세워 놓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현재 우곡리 석인상은 마을 공동체 신앙은 아니다. 우곡리 주민들은 2기의 석인상을 고려시대 석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석인상

절터

우곡마을에서 동남쪽으로 약 400m 정도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면 마을 사람들이 절골이라 부르는 지역이 있다. 우곡리 절터로 추정되는 곳인데, 지정 면적은 33038평방미터()이다. 현재 밭으로 개간되었다. 이 지역 일대 밭에서 기와 조각과 함께 회청색 경질 토기 동체부(몸통) 조각 여러 점이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다. 그 외 우곡리 절터와 관련된 석축(石築)이나 다른 유적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절터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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