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이야기(3) 조선시대 ‘순창 관아’, 어떻게 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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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이야기(3) 조선시대 ‘순창 관아’, 어떻게 변했나?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08.1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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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대부분은 오래된 옛 시청 청사 중심으로 발전해 역사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에 비해 조선시대 330여 군ㆍ현에 달하던 지방 관아는 몇몇 객사와 동헌 건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는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목조건물이 겪은 숙명이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부분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순창읍치 상상도.
▲순창관아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순창객사. 왼쪽 건물이 정청, 오른쪽이 동재(동대청)이다.

 

조선시대 관아 구조

관아(官衙)는 조선시대 지방행정기구 청사가 위치한 마을로 읍치(邑治)라고도 불렀다. 조선 행정단위는 도별로 부-목-군-현 체제를 갖추고, 기초 행정단위인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했다. 따라서 행정단위마다 관아가 설치되었고, 지방관아는 한 도시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지방관아는 유교적 건축 질서에 따라 조성되었다. 지방을 장악하고자 했던 국왕의 공간(객사ㆍ군기고ㆍ하마대), 국왕을 대신해서 파견된 수령의 공간(동헌ㆍ내아ㆍ작청ㆍ군사 등) 그리고 토착 세력의 공간(향청)이 각자 영역을 갖고 공존했다.

순창읍치 모습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의하면 읍치는 객사ㆍ동헌ㆍ질청 등 관아시설 이외에 외아 쪽으로 향교ㆍ사직단ㆍ성황사ㆍ여단(厲壇ㆍ굶어 죽거나 객사한 혼백을 제사 지내던 곳) 등 제사시설이 공통적으로 설치되었다. 

순창관아 중 동헌 등 주요 건물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현 군청 위치에 자리 잡았다. 이후 조선 성종 때 현 등기소와 대일맨션 부근에 목조건물 12칸을 건축해 이(吏)ㆍ호(戶)ㆍ예(禮)ㆍ공방(工房)이 집무하고, 또 6칸을 지어 형(刑)ㆍ병방(兵房)이 집무했다. 동헌 앞에는 연못 응향지를 파고 주변에 응향각ㆍ화방재ㆍ수옥루 등 여러 누정을 세웠다. 

객사(客舍): 국왕의 위패를 모시고 중앙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국가기관. 관아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중요한 건물이다. 순창객사는 창건 연대는 불확실하며, 1759년(영조 35)에 중건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해에 의병장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이 이끈 800여 의병이 진을 치고 항전했던 구국의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 순창초등학교 내에 자리하고 있다. 

동헌(東軒​): 지방수령이 주재하는 행정업무 중심 건물인 정청(政廳)을 이르는 말이다. 후에는 동헌이 관아를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동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재판 장소였다. 마루는 수령이 판결을 내리는 곳이었고 뜰은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현재 순창군청은 동헌 터에 자리 잡고 있다. 동락당(同樂堂)이라는 현판이 있었다.

내아(內衙): 수령의 가족 생활공간으로 사대부가의 안채와 같은 모습이었다. 현 순창초등학교와 경계를 이룬 담장 자리에 위치했다. 

홍문(紅門): 관전(官殿)ㆍ관(官)ㆍ능ㆍ사당 입구에 세운 붉은 칠을 한 문. 30척 이상의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는 붉은 살을 세웠다. 이 문을 통과할 때는 누구나 말에서 내려야 했다. 현 군청 통합기준점 자리 아래쪽에 있었다.

삼문(三門)과 순화아문ㆍ수옥루: 삼문(三門)이란 동헌 앞에 위치한 통로가 셋인 관아 정문을 말한다.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구성되었다. 가운데 문은 수령ㆍ사신ㆍ빈객, 왼쪽 문은 향토의 양반ㆍ아전, 오른쪽 문은 군관ㆍ장교ㆍ백성들이 드나들었다. 대개 누각 형태로 지어졌다.

순창관아 정문은 순화아문(淳化衙門)이다. 현 군청 통합기준점 자리다. 순화아문은 조선시대 순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1층은 출입문, 2층은 누정 수옥루(漱玉樓)다. 1938년 경 매각해 없어졌다. 그때부터 1층에 걸려있던 ‘순화아문(淳化衙門)’ 현판은 객사 동대청 건물에 걸려 있다가 2014년에 ‘옥천지관’으로 교체되었다. 

작청(作廳ㆍ질청, 이방청): 지방 실무를 담당하는 아전(향리)들의 집무 공간. 이방청(吏房廳), 이청(吏廳)이라고도 했다. 조선 전기에는 호장 중심의 체제가 유지되다가 말기에는 이방 중심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호방 중심의 군사(읍사) 기능이 위축되고 작청(이방청)이 지방행정의 중심이 되는 변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향리는 녹봉이 급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뇌물 착복 등 각종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다. 현 순창초등학교 어린이집 자리다.

군사(郡司): 읍사(邑司)라고도 한다. 호장(戶長)이 근무하는 곳으로, 호구 관리ㆍ전결 조사ㆍ조세 부과와 징수 등을 담당했던 공간이다. 현 등기소 부근에 자리 했다.

장청(將廳): 병방(兵房) 소속 장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 상위층은 향리, 하위층은 나졸이다. 현 대일맨션 앞에 있었다.

사령청(使令廳): 수령의 명을 전달하는 사령(使令)이 근무하는 곳. 예전 군청 게시판과 테니스장 중간에 자리했다.

향청(鄕廳): 지방 수령을 자문ㆍ보좌하던 자치기구. 조선 초기에 설치된 유향소(留鄕所)를 임진왜란 이후 대개 향청이라 불렀다. 현 대동병원 자리에 있었다.

형옥(刑獄): 죄수를 가둔 곳. 대개 둥근 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관아 입구에 있었다. 감옥은 남녀를 구분했고 중범과 경범을 가려 수용했다. 객사 남쪽에 있었다.

창고: 곡물ㆍ옷감ㆍ무기ㆍ보물 등을 보관하는 곳. 창고 중 조선후기 대동미를 관장하던 대동청(大同廳)은 현 선명인쇄소 자리에 있었고, 성창(城倉)은 서쪽 금성산성에, 사창(社倉)은 상치등면 등지에 있었다. 

관노청(官奴廳)과 교방(敎坊): 관노청은 지방관아의 관노비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순창관아의 경우, 관기들도 처음에는 이곳에서 대기했다고 한다. 기생들이 기거하며 글쓰기와 음악, 무용을 배웠던 교방은 조선말에 설치되었다. 순창초등학교 교장관사 자리에 있었다.

향교ㆍ서원: 향교는 1읍1교 원칙에 따라 조정에서 설치한 교육기관이기에 관아와 인접한 곳에 있었고, 개인이 설립한 고급교육기관인 서원은 읍치에서 일정 정도 떨어져 입지했다. 화산서원은 유등 오교리에, 무이서원은 팔덕 청계리에 있었다.

조선시대 대표 순창군수

상피제도(특별 연고가 있는 관리는 어떤 지방에 파견되지 못하는 제도)에 따라 타 지역 출신 관리가 순창군수로 재직했다. 조선시대 순창군수 중 우리 역사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주요 인물로는 김정ㆍ고경명ㆍ김천일ㆍ임계영ㆍ서유구ㆍ이단화ㆍ홍기주 등이 있다. 

김정(金淨)은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유옥(柳沃)과 함께 강천산 삼인대(三印臺)에서 중종(中宗) 조에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기개를 보였다. 

임진왜란 당시 뛰어난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리며 금산에서 전사한 고경명(高敬命), 진주성(晉州城)에서 장렬히 순절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전라좌도 의병장으로 경상도 지역 왜적을 섬멸한 임계영(任啓英)도 순창 군수를 역임했다. 다만 논개 모녀를 구제하고 후에 그녀를 후처로 둔, 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최경회(崔慶會)는 순창군수로 발령 받았으나 1590년(선조 23) 모친상을 당해 순창군수로 부임하지는 않았다. 

농업 백과사전이자 생활과학서인 《임원경제지》를 저술한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徐有榘), 시조작가 이세보의 부친 이단화(李端和), 고종 때 여러 고을 수령(守令)으로 근무하며 열네 고을의 지도책 《환유첩》을 엮어낸 홍기주(洪歧周)도 순창군수로 선정을 펼쳤다.

순창군수는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는 문과 출신이 많았지만, 인조(仁祖) 이후로는 대부분 음직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공신이나 재상 후예들을 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지방관아 소멸 원인

지방관아는 조선왕조가 무너지면서 일제의 주도 아래 계획적으로 철거되거나 불하(팔아넘김) 되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방치되어 잡초가 우거지고 퇴락했으며, 혼란기를 틈타 개인에 의해 무단 점유되기도 했다.

일부 관아 시설은 다른 공공시설로 전용(轉用ㆍ다른 용도로 쓰임)되어 새로운 기능으로 사용되었다. 군청과 면사무소, 우편소로 사용되었으며, 일부는 지방법원 출장소(등기소)로도 활용되었다. 객사는 큰 규모를 지니고 있어서 많은 학생을 수용하기 용이해 주로 보통학교로 전용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국 관아 시설 상당수가 본연의 모습과 기능을 잃게 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시설도 한국전쟁 과정에서 소실되며, 대부분 종적을 감추게 된다. 전라북도의 경우 순창객사ㆍ김제 동헌ㆍ고창 무장현 동헌만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순창동헌, 1914년부터 군청사로 사용
1931년 신축, 일본식 현관 설치

동헌은 본래 고을 수령 집무처였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도 많은 지역에서 자연스레 행정시설로 활용되었다. 순창동헌은 철거되지 않은 상태로 1914년부터 군청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순창군청’이라는 이름으로 《전북의 명승병고적(全北の名勝竝古蹟), 1920년대 말》에 실려 있다. 

매일신보 1932년 11월 3일자 기사는 1931년 8월부터 시작된 순창군청 신축 준공 소식과 함께 “구(舊)청사가 협소해 집무하기 불편했기 때문에 청사를 신축했다”는 경위를 전하고 있다. 1957년 발행된 《순창군지》에 군청 위치가 옛 동헌터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을 볼 때, 순창군청 신축공사가 시작된 1931년 무렵, 협소한 사무공간으로 인해 동헌이 철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관아시설 변형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 중 하나는 일본식 현관 설치였다. 건물 정면에 캐노피(canopyㆍ건축에서 기둥으로 받쳐 놓은 덮개) 형식의 지붕을 돌출시킴으로써 출입구를 가진 사무시설의 전형적인 외관을 갖추도록 한 것이다. 공공시설 외관을 전반적으로 통일하려했던 조치였던 것 같다. 

위당 정인보가 기록한 순창관아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독립운동가이자 한학자, 역사학자이다. 4대 국경일인 ‘삼일절ㆍ제헌절ㆍ광복절ㆍ개천절 노래’ 가사를 모두 쓴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순창을 여러 번 방문하는 등 순창과 인연이 깊다. 

정인보는 1934년 7월3일부터 9월말까지 2개월간 전라도와 충청도를 여행했는데, 이때 여행기를 동아일보에 〈남유기신〉(南遊寄信)이라는 제목으로 43회에 걸쳐 연재했다. 일행 중에는 복흥 구암사에서 수학한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노병준(盧秉俊ㆍ쌍치초 설립자) 등 순창 관련 인사들이 있었다. 다음은 동아일보 1934년 9월 11일자에 실린 〈남유기신〉제32신(삼십이신(第三十二信)에 담긴 순창관아 모습이다. 

“순창읍을 와서 보기는 처음이지만 어려서부터 듣던 곳이라 그런지 일종의 구정(舊情)이 끌립니다. 읍양(邑樣)이 전상(前狀)이 아닐 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거니와 그래도 옛 관아의 잔물(殘物)이 혹 남지 아니 하였나 하야 얼마 동안 방황하다 보니 아사(衙舍ㆍ순화아문)정문이 지금은 큰길 복판에 덩그러니 섰고 우편국 옆채에 ‘옥천연방’(玉川椽房)이라는 소편(小扁)이 붙은 것을 보니 그때의 이청(吏廳ㆍ이방청)인줄 알겠습니다. 순창동헌의 고편(옛 현판)이 녹문관(弘文館)이라 전배(前輩)의 제영(題詠) 중 흔히 보이었는데 지금은 유흔(遺痕)도 없고 다만 지관(地官)으로 유명하던 응향각(凝香閣)이 의연(依然)히 옛 단청(丹靑)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계(계단) 위로 홀로 배회할 때 속으로 별한(別恨)이 있었습니다.” - 하략  

정인보는 순창읍 모습이 예전과 달라졌을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옛 관아 건물이 대부분 사라진 것에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1934년 당시만 해도 순창관아 출입문이었던 순화아문과 연못 응향지 주변에 자리한 누정 응향각이 아직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옥천연방’ 현판이 걸려있던 이방청(작청) 건물은 우편국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순창동헌에 걸려있던 녹문관(弘文館)이라는 현판도 흔적 없이 사라져버려, 변해버린 일제강점기 순창읍치 모습에 마음속으로 이별의 한을 느꼈다고 감회를 말하고 있다. 

순창객사의 변천

조선시대 관청을 없앤다는 식민정책에 따라 전국 많은 객사가 매각돼 소멸되었지만 순창객사는 다행히 현재까지 남아있다. 다만 외모와 실내가 원래 모습이 아닌 변경된 상태이다.

순창객사는 당초에는 중앙에 정당(正堂), 좌측에 동재(東齋ㆍ동대청), 우측에 서재(西齋ㆍ서대청), 전면에 중문(中門), 외문(外門), 측면에 낭무(廊廡) 등으로 구성되었다. 현재는 순창초등학교 내에 정당과 동재만 남아 있다. 

정당은 오랫동안 교장실로 사용되다가 도서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동재는 1970년대까지 교무실로 사용했다. 다만 1968년 1학기 때 교실이 부족해 당시 3학년 3반과 4반이 합반해 교실로 사용한 적이 있다. 그 해 3월 초 천장에 판자를 넣어 우물천장을 만드는 등 보수공사를 한 적이 있었다. 충량(衝樑ㆍ한 끝은 기둥에 짜이고 다른 끝은 들보에 걸치게 된 측면의 보)을 걷어냈는데, 그때 필자가 목격한 바로는 충량이 한 마리 거대한 용의 형상을 하고 있어 웅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후 계속 교무실로 사용되다가 1981년 2월에 전면을 해체해 기와를 깔고, 뒷면 북쪽 지붕의 서까래 일부를 완전 보수했다. 그 후 세 차례에 걸쳐 단청공사와 벽체 보수를 하여 관리하고 있다. 순창군은 동재 건물에 걸려 있던 ‘순화아문(淳化衙門)’ 현판을 2015년 1월 2일 ‘옥천지관’으로 교체했다. 순창객사는 1974년에 전북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기타 시설의 변화

작청(이방청)은 현 순창초 어린이집 자리에 있었다. 1904년 11월 1일 우편국(우체국)으로 전용되다가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호장(戶長)이 근무하던 군사(郡司) 자리는 등기소 뒤편에 있었다.

향청은 금융시설로 전용되었다. 이는 1907년에 제정된 ‘지방금융조합규칙’에 따라 지방금융조합이 설립되었고, 이에 따라 각 지방에 금융조합소가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후 1950~60년경에 멸실되었다.

※《옥천군지》(1760)ㆍ《순창군지》(1982)ㆍ《순창군정사지》(1998)ㆍ순창향지지명고(1998) 등을 참고했으며, 2020년 순창군 군민의 장 문화장 수상자 노민(88ㆍ순창읍) 옹께서 많은 도움 말씀을 주셨습니다. 

▲군청으로 활용하던 동헌에 일본식 현관을 덧대어 설치한 1920년대 말 모습.
▲군청으로 활용하던 동헌에 일본식 현관을 덧대어 설치한 1920년대 말 모습.
▲동헌에 들어가는 정문인 순화아문(1층)과 누각 수옥루(2층) 1930년대 초반 모습. 오른쪽은 객사.
▲동헌에 들어가는 정문인 순화아문(1층)과 누각 수옥루(2층) 1930년대 초반 모습. 오른쪽은 객사.
▲1930년대 순창우편국(옛 이방청).
▲1930년대 순창우편국(옛 이방청).
▲1930년대 순창읍 본정통(중심가 길) 모습. 사진 왼쪽이 경찰서다.
▲1930년대 순창읍 본정통(중심가 길) 모습. 사진 왼쪽이 경찰서다.
▲1930년대 순창시장. 사진 제공 종걸 스님.
▲1930년대 순창시장. 사진 제공 종걸 스님.

 


림재호 편집위원
ops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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