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역사(28) - 온달, 전설인가 역사인가
상태바
다시보는 우리역사(28) - 온달, 전설인가 역사인가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10.19 14: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과 함께 고구려 3대 명장
하급 귀족 출신? 외국인 출신?

온달, 전설인가 역사인가

고구려 평원왕(25)영양왕(26) 때 인물들인 온달과 평강공주이야기는 매우 설화적이다. 바보로 알려진 온달, 어릴 때부터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는 말을 믿고 정말 온달에게 달려가 그의 성공을 도와준 평강공주, 그리고 온달의 극적인 죽음.

두 사람의 신분을 초월한 파격적인 사랑과 죽음은 오랜 세월 동안 회자되며 소설희곡드라마영화 소재로 재생산 되어 왔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반대로 여성이 자기 힘으로 못난 남성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평강공주 콤플렉스라는 용어도 이 이야기에서 나왔다.

이야기 자체가 극적인 요소가 많아 설화로 생각하기 쉽지만, 한국 사학계는 온달을 역사적 실존 인물로 인정하고 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정사(正史)삼국사기열전편에 온달전(溫達傳)이 실려 있다. 삼국사기는 신비스러운 내용을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사실에 토대를 두고 괴력난신(怪力亂神)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는 유교적 엄숙주의 역사 기술방법 때문이었다. 그런데 온달의 이름은 삼국사기열전편에는 기록돼 있지만 고구려본기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온달 이야기를 설화인지 사실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 바보였나?

평강공주를 만나기 전의 온달(溫達~590)은 정말 바보였을까? 그가 정말 바보였다면 공주를 만나 몇 년 동안의 공부와 무예 수련으로 고구려란 대제국에서 대장군으로 성장하는 것이 과연 가능했겠는가? 게다가 온달은 을지문덕, 연개소문과 함께 고구려 3대 명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왜 바보 온달이란 말이 나왔을까? 삼국사기열전편 온달전에서 온달을 설명하는 대목에 우온달(愚溫達)’이란 구절이 있다. ‘()’바보어리석다는 뜻으로 단순화해서 생각한 것에서 온 오해일 수 있다.

여기서 우()는 정말 바보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형편이 불우하고 왕실과 혼인을 맺기엔 상당히 낮은 신분이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이치에 맞을 것이다. 온달은 하급귀족이나 평민계층 출신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바보라는 수식어는 자신의 능력으로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신흥 귀족이나 하급 귀족, 혹은 평민 출신이었기에 당시 전통 귀족들이 경멸의 시선을 담아 부르던 호칭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출신의 비밀

사람들이 그를 바보로 놀리는 이유로 삼국사기열전에서는 못생긴 얼굴남루하고 비천한 옷매무새를 거론하고 있다. ‘남달리 못생긴 얼굴이라고 거론하고 있는데, 보통의 고구려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겼다는 이야기는 아닐까? 또 옷매무새를 거론한 것도, 온달이 특이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 아닌가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그가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지역 소그드인 출신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하기도 한다. 당시 천산산맥 너머 소그디아와 고구려의 사신왕래가 빈번했고(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벽화에 고구려 사신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소그디아에 대해 신당서'온씨'가 왕을 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소그디아 출신 중에 안 씨’, ‘온 씨등의 성씨를 가지고 활동한 사람들이 많기도 하다. 당나라에서 난을 일으킨 안록산도 소그디아 출신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활동한 온 씨는 온달 외에 신라 무열왕 김춘추의 호위병으로 활동했던 온군해가 거의 유일하다. 참고로 금구(金溝) 온씨는 김제시 금구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온달을 원시조로 한다. 경주 온씨의 시조는 온군해(溫君解).

온달의 성씨가 우리 역사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씨라는 것, 그의 얼굴이 남다르게 못생겼다는 것, 그리고 옷차림이 특이했다는 것, 그리고 고구려와 빈번하게 접촉하던 소그디아의 왕족 성씨가 온 씨였다는 것으로 인해 온달이 소그디아 출신이거나 그 후손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바보 온달은 특이한 생김새와 가난하지만 우직한 성품으로 고구려 수도에서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역사무대 등장

평강공주는 어릴 적 울보여서 부왕인 평원왕이 늘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농담을 했다. 공주가 16살이 되어 귀족인 상부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임금은 허언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온달과 혼인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아버지 평원왕은 그녀를 궁중에서 쫓아냈다. 그녀는 온달을 찾아가서 궁궐을 나올 때 가지고 나온 패물을 팔아 마소를 사는 등 넉넉하게 살림살이를 꾸리고 온달에게 말 부리기와 활쏘기를 연습시켰다.

그렇게 수년 후, 온달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고구려에서는 33, 낙랑언덕에서 사냥하고 그것을 제물로 하늘에 제사지내며, 그 행사에 왕이 친히 나선다. 이날엔 고구려에서 한다하는 장정들이 나서는데, 사냥을 하며 왕 앞에서 기마술과 궁술 기량을 선보인다.

온달은 이 사냥대회에서 발군의 기량을 펼쳐 왕과 뭍 신료들의 시선을 끄는데 성공하면서 화려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곧이어 중국 북부를 지배하던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자, 평원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이산(肄山) 벌판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온달이 선봉에 나서 큰 활약을 펼치고 북주의 대군을 격파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승전 후 개선하면서 전공을 논하는 자리에서 모두 전공의 제일을 온달의 것으로 인정했다. 왕은 이 자가 바로 나의 사위다라고 선언하면서 온달에게 대형(大兄)이란 벼슬을 주었다. 온달이 평원왕의 부마이자 대형이란 직위를 가진 고위 귀족으로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온달 전사한 아단성은 어디?

평원왕이 죽고 평강공주의 오라버니인 영양왕이 왕위에 올랐다. 온달이 영양왕에게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북 한강유역을 되찾아 오겠다고 출정을 요청했다. 왕의 허락을 받고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령(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를 장사 지내려 했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가 이미 결판이 났으니, 아아! 편히 돌아가시라하니 그제야 관이 들렸다. 유명한 삼국사기》 〈온달전마지막 대목이다.

그런데 정작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의 위치를 둘러싸고는 두 가지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한강 하류인 서울 광장동 사적 아차산성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남한강 상류 단양군 영춘면 온달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두 장소 모두 온달 관련 전설이 있다.

'아단성=아차산성' 설은 고구려와 신라가 주로 충돌한 지역이 한강 하류 일대라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이름에 '()'이 있어, ‘’()’()로 피휘 했다는 견해도 있다.

단양 온달산성의 경우, 단양 영춘면의 옛 지명이 을아단현(乙阿旦縣)으로 을은 곧 위()을 뜻하는 것으로 한강 상류 아단현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온달이 출정해 목표로 삼았던 죽령과 계립령이 지척이라는 것도 설득력을 더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단양 온달산성을 온달이 쌓았다는 기록들이 여지도서등 여러 문헌에 실리면서 온달 전사지가 단양 온달산성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고고학 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양 온달산성은 신라가 쌓은 성으로 밝혀졌다. 주위에 고구려 유적유물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군이 신라 영토 깊숙한 남한강 상류 지역까지 공세를 취한다는 게 군사전술상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 든다. 당시 정세에서 볼 때 고구려군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정상적인 공격이라면 한강 하류에서 임진강을 건너 아차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단양 영춘 온달산성 일대에 온달과 관련된 설화가 남게 된 것일까? 온달 관련 기사가 언급되기 시작한 때는 18세기 영조 이후 문헌부터이다. 영춘의 옛 지명이 '을아단'이었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온달 전승과 연계시켰던 것 같다. ()의 표상으로서 온달에 대한 기억을 널리 환기시키려는 뜻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42년에 발행된 조선보물 고적조사 자료에서 고성(古城) 이름마저 아예 온달성으로 기록하면서 전승의 결합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서울 아차산에서도 온달 전승이 새삼스레 환기되고 있다. 사적 455호 아차산에 고구려 보루 등 고고학적 자료들이 새롭게 발굴되고 있다. 여기에 동상도 만들어지고 온달장군 주먹바위, 평강공주 통곡바위 등 그럴싸한 이름이 아차산 곳곳에 붙여지고 있다.

아차산 온달장군 주먹바위
아차산 평강공주 통곡바위
단양 온달산성
단양 온달산성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조합장 해임 징계 의결” 촉구, 순정축협 대의원 성명
  • 순창군청 여자 소프트테니스팀 ‘리코’, 회장기 단식 우승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