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재호] 읍ㆍ면지 발간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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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재호] 읍ㆍ면지 발간에 바란다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10.1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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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본지(열린순창 557)에 보도된 것처럼 순창읍과 팔덕쌍치풍산면이 읍면지 발간작업에 들어갔다. 군지나 읍지면지는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우리 고장의 역사문화사회경제풍속 등 모든 분야의 변화발전상을 집대성함으로써 주민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지역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

군지와 읍면지는 지역 관련 학술 문헌이나 홍보물 등의 1차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적과학적으로 근거가 분명한 객관성이 요구되며, 잘못되거나 왜곡된 내용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향토지역사 서술의 자세다.

조금 장황하긴 하지만 조선시대 논개와 남편 최경회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우리나라 사람 중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순국한 논개(論介)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경남 진주 의기사, 전북 장수 의암사, 전남 화순 충의사 등에서 그녀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1620년 무렵 유몽인(柳夢寅)이 야담집 어우야담에서 논개는 진주 관기였다라고 기술한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논개는 기생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논개(論介)는 전북 장수군 장계면 주촌마을에서 주달문(朱達文)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학덕이 높은 훈장 집이었다. 논개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떴고, 모녀는 한 마을에 살던 숙부에게 기대어 살게 되었다.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한 숙부가 벼 50석에 김씨 부호의 집에 그녀를 민며느리로 혼인시키려 하자, 모녀는 이를 피해 경상도 안의현(현재 경남 함양군) 친가에 피신했지만, 부호가 기소해 모녀는 구금된다.

이때, 장수현감 최경회(崔慶會)의 명판결로 모녀는 석방되고, 그들은 현감 관저에 의탁하게 된다. 후일 최경회가 성년이 된 논개를 후처로 맞아들인다.

담양부사로 있던 최경회는 1590년 모친상을 당해 관직을 사임한 후 시묘를 위해 고향으로 가면서 논개를 그녀의 고향 장수로 보낸다. 2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최경회는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병사를 훈련할 때 논개는 이를 도우며 보필한다.

금산과 무주에서 전주와 남원으로 진격하는 왜병을 크게 격파함으로써 진주로 집결하는 왜군을 방어해 진주대첩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때의 전공으로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최경해가 출전할 때 논개도 동행한다. 최경회는 2차 진주성전투에서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분전했으나 9일 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결국 남강에 투신자살한다. 일본군들이 진주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 논개는 은인이자 남편이었던 최경회의 복수를 위해 관기로 위장해 왜장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진주 남강 진주 의암에서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해 순절한다.

2015년에 간행된 순창군지는 최경회에 대해 조선 전기 순창군수를 지낸 문관이자 의병장이다. (중략) 1590(선조 23) 모친 평택 임씨의 상()을 화순에서 치렀다. 실록 등에 의하면 1591년에 순창 군수에 임명되었다고 하는데, 상중(喪中)에 벼슬에 나아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최경회가 순창군수에 임명은 되었지만 모친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순창군수로 부임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순창군지는 최경회가 상중이어서 순창군수직을 수행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기술하면서도 제4편 삶의 주체(성씨인물) 편에 순창인물로 수록했다. 이로 인해 군민들은 논개를 구한 의리남이자 의병장인 최경회가 순창군수를 역임한,순창과 인연이 있는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기록을 바탕으로 유등면지(2020)는 논개가 순창 출신이라는 황당한 주장까지 하고 있다. 혹시 다른 지역 사람이 볼까봐 낯이 후끈거린다.

수천만 원의 발간비용을 들였음에도 일부를 제외하면 군내 기존 면지는 내용이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군지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붙인 것들이 많다. 세시풍속이나 민속놀이 부분에서는 전국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내용을 실어놓았다.

여씨춘추(呂氏春秋)라는 책이 있다. 거상이자 진()나라 재상이었던 여불위(呂不韋)가 전국의 논객과 식객들을 모아 기원전 239년 편집한 백과사전이다. 여불위는 이 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그는 이 책을 수도 함양 저잣거리에 전시해 놓고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고칠 수 있다면 천금을 주겠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면지를 발간하기 위해서는 군이 각 읍면지 추진 단체에 3000만 원 정도를 지원하고, 각 읍면은 지역민이나 향우에게 향토애를 호소하며 피 같은 돈을 모금할 것이다. 면지는 지역민과 향우들의 피땀 어린 돈으로 제작된다. 기존 면지와는 달리 참신해야 한다. 직접 발로 뛰어 지역 내에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를 취합정리하고 구술 자료를 최대한 확보해 내실 있는 읍면지를 만들어야 한다.여씨춘추까지는 아니어도 타 군과 비교해 부끄러운 읍면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림재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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