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곡
가을이 저물어 간다. 저물어 가는 가을이 이상한 그림을 그린다. 10월의 빛깔이 예년과 같지 않다. 원래의 제 빛을 잃어버린 이렇게 뻔뻔한 가을빛은 처음 본다.
그해 낯선 이방의 뜰에서 우리는 서성대고 있었다. 무작정, 무작정 시간 흐르기만 기다리는 우리들 앞에 그 공원의 은행나무 잎은 찬란했다. 구부러진 길섶에는 갈대꽃, 억새꽃이 무성하게 피어 흔들리고 있었다. 처절한 흔들림, 아이는 그 가을빛에 지쳐 울음을 터트렸고 우리는 그 울음과 함께 할 수 없는 통증을 속으로 참아내야 했다. 다시는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그 날의 아픔,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 상처를 준 계절의 얼굴이라 믿었다. 해 걸러 그날이 돌아오면 망각이 문 앞에 서 있기를 빌었다.
세월의 그림은 어차피 실체 없는 기억일 뿐이다. 뒤틀린 감회의 민낯을 보는 듯 이 뻔뻔한 계절이 오히려 그 기억을 짓누른다. 아프고 슬프더라도 그 찬란했던 빛깔에 파묻히는 회상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달콤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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