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이야기(6)죽림정사 창건한 도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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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이야기(6)죽림정사 창건한 도문 스님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11.0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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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림씨 21세손 림윤화. 임철호ㆍ최사달 자

용성 스님과 죽림정사, 도문 스님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백두대간 한복판 장안산(1237m) 자락에 자리 잡은 죽림정사.

독립운동가이자 근대 한국불교의 큰스님인 용성 스님 생가터를 복원하고 지은 사찰이다. 30여 년 각고 끝에 후학들과 국가보훈처, 장수군 등의 지원에 힘입어 완성했다.

용성 스님(龍城18641940)3.1운동 때 만해 한용운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독립선언에 참여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1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 최초로 도성 안 창덕궁 앞에 포교당인 대각사를 열고, 한자로만 되어 있던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앞장섰다. 직접 생계를 해결하며 수행하자는 선농일치(禪農一致) 운동을 전개하기도 한 대선사였다.

파밭으로 방치돼 있던 용성 스님 생가터를 복원하고 그곳에 죽림정사 창건을 주도한 이는 바로 용성 스님의 손자뻘인 조계종 원로의원 도문 스님(87)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스님 될 운명

도문 스님은 평택 임씨 순창관 21세손이다. 1935년 남원 운봉면 동천리에서 태어났다. 조상 대대로 살던 순창을 잠시 떠나 운봉에서 태어났지만 몇 년 후 순창읍으로 이사했다.

용성 스님과 도문 스님의 인연은 출가 전 집안에서부터 맺어졌다. 도문 스님의 증조부 사은(士殷) 임동수 거사는 용성 스님 후원자이며 도반(道伴함께 도를 닦는 벗)이었다. 용성 스님은 도반에게 손자를 낳으면 용성의 법을 잇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은 선생의 손자, 즉 도문 스님의 속가 부친인 임철호 거사는 용성스님의 재가 상좌이자 물질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독립지사였다. 도문 스님의 부친이 일경에 체포돼 전주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용성 스님이 부친을 만나기 위해 12차례나 면회 왔다.

용성 스님은 임철호 거사에게 자손을 잘 가르쳐 출가시킨 뒤 인도와 중국에서 전해진 정법을 이을 수 있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세속 이름은 윤화(允華), 법명은 도문(道文)으로 부르라고 지어주었다.

용성 스님이 어린 윤화를 찾아온 것은 입적을 몇 달 앞둔 1940년 음력 1월이었다. 스님은 6살 된 윤화의 손을 꼭 잡더니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집안 어른들에게 12살이 되면 자신의 법을 이은 동헌완규(東軒完圭1896~1983) 스님을 은사로, 만암 스님을 계사로 출가해 공부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거듭 당부했다.

이때부터 할아버지 임정준은 어린 손자를 매일 앉혀놓고 한학을 가르쳤다. 천자문을 비롯해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5(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을 가르쳤다. 그리고 손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가야, 너는 용성 큰스님의 법을 이을 아이란다. 이번 생은 안 태어난 셈치고 부디 열심히 공부해서 큰 도인이 되거라.”

19468, 12살의 윤화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따라 전남 장성 백양사로 향했다. 조부 임정준은 어린 손자 윤화의 출가를 지켜보는 안타까움을 누를 길 없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조부모의 구운몽 읽는 소리와/ 금강반야바라밀경 육조단경을 듣고/ 선세의 인연을 따라 출가 발원하니/ 천지도 막을 수 없는데 누가 있어 막으리오.”

- 법보신문 201751일자 기사 일부 인용

 

12살에 출가해 거침없이 정진

도문은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 10계를 수지하고 동헌 스님을 은사로 출가자의 삶을 시작했다. 출가 전부터 한학을 통달한데다 독실한 불제자 집안에서 자란 그의 정진은 거침이 없었다. 12세 때인 19468월 만암 대종사로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화두를 결택 받고 인가 받았다. 당시 백양사에서 일주일을 꼼짝 않고 앉아 정진했다. 만암 스님은 그 장엄한 광경에 탄복해 무조건 인가를 내렸다고 한다. 만암 스님은 이어 제방의 큰스님들에게 인편과 우편으로 이 사실을 알리고 점검을 요청했다.

얼마 후 도문 스님을 점검해보겠다는 답을 보내온 이는 밝은 선지(禪旨)와 높은 학문으로 이름난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 스님이었다. 한암 스님은 도문 스님의 종조부이자 방정환의 사위였던 동양화가 임봉권에게 도문 스님을 오대산까지 데려다 줄 것을 요청했다.

1949년 여름, 출가한 채로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도문은 방학을 이용해 종조부와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을 찾았다. 도문은 선방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여름 내내 정진하고 점검을 받기 위해 조실방에 들어갔다. 한암 스님은 도문에게 말했다. “네가 앉아 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더구나. 내년 여름에 다시 와서 인가를 받도록 하여라.”

 

용성 스님에서 동헌도문으로 이어진 정법

이때 도문의 눈앞에 다음해인 1950년 나라 곳곳이 불바다가 되는 광경이 나타났다. 도문은 조실방을 나온 뒤 이러한 내용을 종조부에게 얘기했다. 그러고는 조실 큰스님도 내년에 입적하는데 어떻게 인가를 받을 수 있겠느냐며 지금 인가해달라고 청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암 스님은 종조부에게 ()이 맑으면 그렇게 될 수도 있으니 그리 알고 내년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다음해 625, 실제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암 스님은 탄허 스님에게 전쟁이 끝나면 도문 수좌를 찾아서 전쟁 통에 불타 없어질 월정사 적광전 복원불사 화주증명법사로 삼으라고 당부했다.

오대산을 떠난 도문 스님은 화두 공부를 계속 이어갔다. 19507월 남원 실상사에서 견도(見道)한 것을 시작으로 1954년에는 부산 범어사 조실 동산 스님으로부터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로, 1959년에는 순창 대모암에서 학선 스님으로부터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화두로 각각 인가를 받았다. 1961년에는 범어사 주지를 맡고 있던 은사 동헌 스님으로부터 시심마(是甚麼) 화두로 인가를 받았다. 마침내 용성 스님에서 동헌 스님으로 이어지는 정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법륜보광학담 등 쟁쟁한 제자들

이 무렵 오대산 월정사 중창불사에 착수한 탄허 스님은 제자들을 보내 도문 스님이 와줄 것을 거듭 요청했다. 이에 도문은 오대산으로 가 월정사 불사를 돕는 한편 본격적인 전법활동에 나섰다. 낙산 보육원장을 시작으로 삼척 흥복사강릉 관음사평창 극락사 주지를 맡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독실한 불자였던 박경원 강원도지사의 도움으로 도내 19개 시군을 돌며 법문을 설했다.

그렇게 6년을 보내고 도문은 은사 동헌 스님이 머물던 경주 분황사로 내려왔다. 1967년 분황사 주지 소임을 맡은 도문이 역점을 둔 것은 젊은 층 포교였다. 도문의 해박한 지식과 거침없는 언변, 확고한 신념에 대중들은 환호했고, 사람들은 속속 불교에 귀의했다.

막사이사이상과 만해상을 수상한 죽림정사 주지 법륜 스님은 17살에 경주 분황사에서 도문 스님과의 선문답을 계기로 출가하게 되었고,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인 보광 스님도 분황사 주지 시절 고등학생을 불문에 맞아들였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당시 서울대 법대생이었던 학담 스님은 도문 스님의 즉문즉설에 매료돼 법관이 되려는 꿈을 접고 제자가 되었다.

 

용성 스님 유훈사업 달성

용성 스님이 생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은 가야고구려백제신라 우리나라 불교 전래지의 성역화사업, 경전 100만권 번역과 배포, 100만 명에게 불교의 계를 줄 것, 부처님 주요 성지에 한국사찰을 건립할 것 등 10가지였다.

이러한 유훈사업은 동헌 스님에게서 상좌인 도문 스님에게까지 이어졌다. 도문 스님은 용성 스님 유훈을 실현하기 위해 1961년부터 60년 넘게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가야의 불교전래지 경남 창원 봉림산에 봉림선당지 부지를 확보했다. 당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진경대사보월능공탑’(보물 제362) 등 보물 2점까지 건지는 개가를 올렸다. 또 백제 불교전래지인 서울 서초구 우면산에 대성사를 건립했고, 신라 불교전래지인 경북 구미 도개면에 사찰 아도모례원 등을 지어 성역화했다. 또 부처님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에 대규모 한국 전통 사찰 양식의 대성석가사를 건립했으며, 붓다가야, 녹야원 등지에도 성지를 가꾸는 사업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하나도 실현하기 힘든 과제를 스님은 거의 달성했다. 불경어록 편찬은 약속한 권수를 훨씬 넘겼다.

1998년에는 장수군 장안산 아래 위치한 용성 스님 탄생지를 성역화 할 것을 발원하고 불사에 착수했다. 속가 가족을 비롯한 용성진종 조사 유훈실현후원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6500평방미터(5000여 평)를 구입해 성역화 기초를 닦았다. 이어 대웅보전 건립을 시작으로 꾸준히 불사를 진행해 용성 스님 생가, 승방 요사, 용성교육관, 용성기념관, 충의원통문, 행당 등을 차례차례 세웠고, 200710월 마침내 죽림정사 낙성식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끝없는 자비심

도문 스님의 자비심은 끝이 없기로 유명하다. 사람대접에도 극진하고 불쌍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런 일화가 있다. 1970년대 어느 날 유훈실현사업회 사무실로 사용할 아파트 구입 대금을 갖고 계약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말죽거리 주변을 지나는데 아기를 업고 커피를 파는 남루한 여인을 만났다. 스님은 동행한 둘째 여동생을 먼저 보내고는 계약금을 전부 그 여인에게 주었다. 500만 원이었다. 스님은 부친 임철호 지사 때문에 받는 독립유공자 보상금도 매월 이웃돕기에 내놓고 있다.

용성 스님의 아난’(阿難석가모니의 십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도문 스님. 후세 사람들이 용성 스님의 진가를 파악한 것은 전적으로 도문 스님의 헌신적 노력 덕분이었다. 수십 년을 오직 용성 스님 유훈에만 매달리다 보니 사람들은 도문 스님 하면 용성 스님을 떠올린다. 덕분에 사람들은 잊힐 뻔했던 민족의 큰 스승을 되찾았다.

도문 스님은 현재 부산 천마산 중생사에 머물고 계신다. 도무지 잠이 없는 스님은 230분이면 새벽예불을 올린다. 용성 스님 유훈 실현에 신명을 바쳐온 스님은 이제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의 가르침을 쉽게 풀어내는 것이 마지막 바람이다. 그런 뒤에는 육체라는 헌옷을 훌훌 벗어놓고 극락세계에 가서 부처님의 미묘법문을 듣고 무생법인을 얻는 것이 원이라 한다.

 

도문 스님
죽림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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