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많은 추념비, 공덕비, 추존비, 추모비가 함께 모셔져 있는 묘역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묘역 입구에는 ‘고령신씨귀래정파’라는 문구가 쓰인 커다란 표지석이 놓였다. 명의는 두 줄로 ‘고령신씨 귀래정공파 종회’, ‘재단법인 귀래문화’로 돼 있다.
묘역의 가장 안쪽에는 봉분 2기가 자리했다. 주인공은 ‘귀래정 신말주 선생’과 ‘순창 설씨 부인’이다.
지난 7일 오전 10시 15분 무렵 찾은 고령신씨 귀래정공파 묘역은 곡성군 옥과면 광암마을의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있다.
봉분 2기를 바라볼 때 오른편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2008년 4월 신도비 보호시설로 만든 ‘귀래정공신도비’ 안내문에는 “여기 모신 신도비는 귀래정공 서거 이듬해 5월 대사성 이과 공이 쓴 신도비문과, 5년 뒤 설씨 할머니(설씨 부인)의 별세로 정민 공께서 쓴 첨문으로 구성되었다”며 “신도비 건립 504주년을 맞아 이 사실을 석문으로 남긴다”고 쓰여 있다.
1504년 세워진 신말주 신도비
신말주 선생은 1429년(세종11)부터 1503년(연산군9)까지 살았다. 기록대로라면 이 신도비는 1504년에 세워졌다. 지금까지 500년이 넘게 보존돼 온 신도비는 비바람과 눈보라에 풍화돼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신도비는 유구한 세월을 한 편에서 묵묵히 지켜본 셈이다.
시제는 전통예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지냈다. 산신제를 지낸 후 신을 모셔오는 강신례(降神禮)를 시작으로 초헌례-아헌례-종헌례-유식례-음복례 그리고 신에게 이별을 고하는 사신례(辭神禮) 순으로 진행됐다. 차례대로 석 잔의 술을 올리는 초헌관(1째 잔)ㆍ아헌관(2째 잔)ㆍ종헌관(3째 잔)을 맡은 제관 3명은 모두 빨간색 예복을 갖춰 입었고, 축문을 읊은 축관은 파란색 예복을, 그 외 제사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제의 복장을 갖췄다.
고령신씨 귀래정공파 종회는 이날 총 3번에 걸쳐 제를 올렸다. 신말주 선생과 설씨부인 묘에서 첫 번째 시제를 올린 뒤, 곧바로 묘역 맞은편에 위치한 봉분 2기에도 제를 올렸다. 맞은편 묘는 바로 신말주 선생의 장인어른인 순창 설씨(옥천 설씨) ‘설백민’과 정부인 ‘진주 형’씨가 잠든 곳이다.
신태호 종회 회장은 “여기 잠드신 순창 설씨 장인어른이 외동딸만 낳으셔서, 우리가 500년 넘게 외손봉사를 하고 있다”면서 “무관 벼슬을 지낸 외갓집(장인어른)이 천석꾼, 엄청난 부자였다”며 말을 이었다.
“음력 시월 초하룻날은 우리(고령신씨) 시조, 다음날은 2세ㆍ3세ㆍ4세ㆍ5세ㆍ6세까지 지내고 초 사흘째, 3일째는 여기서(귀래정공파 시조인 신말주 선생에게) 시제를 지내요. 매년 날짜는 정해놓아서 변동이 없어요.”
순창설씨 외손봉사 이어온 고령신씨
신말주 선생의 아들인 신홍의 묘에서도 제가 올려졌다. 순창읍 무수마을 산등성이에 자리한 신홍의 묘에 올린 제에서는 신정이 군의원이 후손 자격으로 초헌관을 맡았다.
종회 회원들은 한 목소리로 “감투를 함부로,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면서 “여성이 우리 고령신씨 시제에서 제관을 맡은 건 500년 만에 처음 있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회원들은 이어 “시대가 바뀌었으니, 여성이 제를 올리는 건 상관 없다”고 웃었다. 초헌관으로 술을 올리고 음복례 등을 맡은 신정이 의원은 “개인적으로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종회 어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날 시제에는 88세 종회 회원부터 전국 각지에서 참석했다. 한 회원은 “코로나가 처음 발생했던 작년보다는 시제에 많이 참석하셨다”며 “며칠 있다가 남산대에서도 따로 제를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고령신씨 시제가 있다는 말에 무작정 취재를 하겠다고 찾았던 지난 7일 일요일. 제사 3번을 마치니 오후 2시 무렵이었다.
고령신씨 귀래정공파는 조선초기부터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까지 제를 이었다. 504년부터 지내기 시작했다면 꼬박 517년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신태호 회장은 “순창설씨 장인어른 부부와 신말주 선생과 설씨부인이 왜 옥과면에 모셔졌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면서도 “외손봉사를 이렇게 오랫동안 하는 문중은 아마도 고령신씨밖에 없을 것 같다”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신말주ㆍ설씨부인의 묘는 건너편에서 설백민ㆍ진주형씨의 묘를 바라보고 있다. 장인과 장모, 엄마와 아빠를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셈이다.
처가 향리에서 터 잡은 신말주
신말주 선생의 호인 귀래정(歸來亭)은 순창읍 가남리 남산대에 있는 정자 이름이기도 하다. 남산대는 신말주 선생 덕을 톡톡히 봤다. 신말주는 다섯 형제 중 막내로 신숙주(세째)의 동생이다. 신말주는 세조가 조카(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1456년(세조2) 처가인 순창 남산대로 낙향해 귀래정를 지었다. 아내 설씨 부인은 문장과 서화에 능했다. 설씨 부인이 1482년 순창의 강천사를 위해 지은 <설씨부인권선문(薛氏夫人勸善文)>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신말주 후손으로는 순창에서 태어난 청백리 신공제, 실학자 신경준 등이 있다.
가을에 어울리지 않게 오후 햇살이 무척이나 따가웠다. 높게 드리운 푸른 하늘을 보며 든 생각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이었다. 옛 것을 알고 새로움을 아는 것, 진부한 말이기는 하지만 500년을 넘게 지극 정성으로 조상을 모시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생각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