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역사(29) 고구려ㆍ당 1차 전쟁과 안시성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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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역사(29) 고구려ㆍ당 1차 전쟁과 안시성대첩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11.24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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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우리 역사 - 우리 역사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거리가 많습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준 역사적 사건들을 객관적이면서도 주체적 시각에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수나라 멸망 이후 혼란한 중국 대륙을 통일한 당나라는 태종 집권기에 국내가 안정되자 주변의 동돌궐서돌궐토번고창국 등을 차례로 굴복시켰다. 642년까지 당에 굴복하지 않은 나라는 고구려뿐이었다.

645,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 자부했던 당나라와 30년 전 수나라를 멸망시킨 고구려 간에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 태종은 그동안 준비한 정예군을 유주에 집결시키고 세 갈래 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총사령관인 이세적이 선발대 6만 명을 이끌고 당 태종의 친정군 20만 명이 뒤를 따랐으며, 수군 43000명을 태운 500척의 배가 서해로 향했다.

당나라 측은 6453월 말 고구려 국경에 진입한 뒤 불과 한 달 반 만에 개모성백암성요동성 등 고구려의 주요 거점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다음 목표는 안시성이었다.

역사스페셜이 복원한 안시성 이미지

 

 

주필산 전투

 

안시성 전투는 당 태종이 직접 선두에 나서 전투를 독려할 정도로 두 나라의 운명을 건 승부였다. 고구려 집권자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621일 북부 욕살(고구려 지방 장관)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15만 군사를 맡겨 안시성 구원에 나서게 한다. 623일 안시성 40리 앞 지점에서 두 나라 정예군 25만 명이 훗날 주필산 전투로 불리는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당 태종의 계략에 빠져 처참하게 패하고, 군을 이끌었던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 태종의 길잡이로 전락하고 만다.

당 태종은 주필산 전투 직후 고구려가 나라를 들어 존망을 걸고 왔으나 (내가) 한 번 깃발을 들어 패배하니 천우가 나에게 있다고 기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주필산 전투 패배는 치명적이었다. 고구려는 풍전등화 상태였고 안시성은 고립무원에 빠졌다.

 

안시성을 구원한 40

 

이때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6월 말 안시성 앞에 진주한 당나라 군대가 8월 초순까지 약 40여 일 동안 공격하지 않은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당 태종이 요동으로 향했을 무렵 몽골고원에는 설연타(薛延陀)라는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설연타의 지도자는 진주가한(眞珠可汗)이었는데 당 태종이 그를 포섭하려고 공주를 시집보내기로 약속했다. 진주가한은 폐물 명목으로 말 5만 마리소와 낙타 1만 마리10만 마리를 각 부족에게 거둬들인 뒤 당 태종에게 보냈는데, 당 태종의 일방적 혼인 취소로 진주가한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지도자로서 위신에 큰 손상을 입었다.

송나라 때 사마광이 집필한 자치통감에는 주필산 전투 직후 고구려 측 움직임이 기록되어 있다. “당 태종이 주필진에서 고구려 중앙군을 대파했다. 이에 막리지(연개소문)는 말갈인 사절을 설연타에 몰래 파견했다.” 말갈인 사신이 거대한 이익을 조건으로 진주가한에게 당을 공격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연개소문이 보낸 말갈인 사신은 수완이 꽤 뛰어났던 것 같다. ‘당나라 주요 병력은 안시성에 집중되어 있으니 지금 당나라 본토를 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지난번 혼인 사기로 입은 손해도 우리가 갚아줄 수 있다는 식으로 꼬드긴 것이다.

설연타 측은 7월 중순경 수만 명의 병력으로 당나라 북쪽 국경을 침공한다. 졸지에 두 개의 전선 사이에 놓인 당 태종은 황급히 추가로 군사를 보내 설연타의 군대를 막게 했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눈앞에 두고도 40여 일 간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다.

설연타 덕분에 안시성은 40일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얻었다. 안시성주는 이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병사들도 충원되었던 같다. 설연타의 침공을 격퇴한 당 태종은 대군을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했지만 안시성주와 병사들의 필사적인 방어에 막힌다. 성벽보다 높은 토성(土城)을 만들어 시도한 공격마저 무위로 돌아갔다. 때는 918, 양력으로는 10월 말이다. 요동벌판은 이미 초겨울에 접어들었다. 당 태종은 결국 말머리를 돌린다.

이전까지 그 수많은 전쟁에서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던 당 태종 이세민이었다. 그래서인지 고구려 침공에 대한 그의 집념은 645년 안시성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647년 이세적 등을 보내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러나 모든 시도가 실패하자 649년 세상을 떠나면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중단하라고 유언했다.

 

당 태종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았나?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명군 이세민이 연개소문의 고구려 군에게 대패했고 비참하게 퇴각 길에 올라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퇴각하는 당 태종 군대를 추격해 여러 차례 위기에 몰아넣었고, 북경 근처까지 진격했다고 주장했다. 북경 주변에 고려성이라는 이름의 성이 있고 고려가 들어가는 지명이 여러 군데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자치통감에는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퇴각하면서 요동의 늪지대인 요택을 지날 때 수레에서 내린 뒤 밀며 갔다는 기록이 있다. 6459월 안시성에서 철수한 뒤 곧바로 수도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장안을 위협하던 설연타족을 토벌하고 6개월이 지난 6462월에야 복귀했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역사책에도 안시성 전투에서 당 태종 이세민이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그런 이야기는 왜 전해져 온 것일까? 고려 말 문인 이곡의 <가정집>과 그의 아들 이색의 <정관음>, 조선 중기 문인 김창업의 <가재연행록> 등의 한시(漢詩)에 그 내용이 나온다. 이를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 사실로 기술해 오늘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안시성을 지킨 주역들

 

안시성을 지킨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먼저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이름으로 남은 안시성주와 성을 지킨 병사들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다.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15만 명의 구원병을 보내고, 기민한 외교술로 대처한 연개소문도 주역 중의 하나일 것이다.

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말갈인사신이다. 말갈인은 고구려 사회에서 2등 국민 같은 신분이었지만, 연개소문은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말갈인에게 고구려의 운명을 맡겼다. 설연타의 사정에 정통하고, 외교관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났던 그는 설연타를 전선(戰線)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한, 안시성대첩의 또 다른 공로자였다.

 

안시성주는 양만춘?

 

안시성대첩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이를 둘러싼 주요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645년 당 태종이 이끈 수십 만 대군과 맞서 80일 동안 안시성을 지킨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황제(당 태종)가 백암성에서 이기고 이세적(당 태종의 심복)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병력이 정예이며, 그 성주가 재능과 용기가 있어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막리지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 (막리지가 안시성을) 그에게 주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보장왕 4)

삼국사기가 전하는 안시성주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다. ‘안시성주라고만 나올 뿐 이름은 물론 출생지나 생몰연도 등 어떤 구체적 단서도 기록되지 않았다. 김부식도 안타까웠는지 그 성주는 가히 호걸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 그 성명이 전하지 않으니 매우 애석하다고 덧붙였다. 안시성 전투를 다룬 중국 측 사서에도 안시성주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러면 안시성주는 왜 양만춘으로 알려졌을까?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조선 선조 때다. 예조판서였던 윤근수가 쓴 월정만필에 임진왜란 때 만난 명나라 장수의 말을 빌려 당서연의라는 중국 책에 안시성주가 양만춘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전한다. 이후 송준길, 박지원 등이 이를 받아쓰면서 안시성주=양만춘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당서연의는 명나라 시대에 당 태종 일대기를 소설화하여 큰 인기를 끌었던 책이다. 학계에선 양만춘은 작가가 지어낸 가공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실제로 고구려 주요 인물 중 양()씨 성을 쓰는 인물은 없다. 이수건 전 영남대 교수가 쓴 <한국의 성씨와 족보>(서울대학교출판부, 2003)에 따르면, 고구려 시대 성씨로 해명임을지 등이 존재하지만 양씨는 등장하지 않는다.

 

안시성은 어디일까

 

근래 중국과의 교류가 시작되고 학자들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자 안시성의 비밀도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해성시의 영성자산성을 안시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영성자산성은 병풍을 두른 듯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로봉식 산성으로 먼 곳에서도 한눈에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성내 넓이는 동서 1킬로미터, 남북 0.5킬로미터에 총길이 4킬로미터 내외의 작은 성이지만 북쪽으로는 해성하(태자하 지류), 서쪽으로는 팔리하를 해자로 한 절벽이 있어 산성으로서 천혜의 이점을 갖고 있다. 서문지(誓文址)로부터 동쪽으로 길이 나 있으며, 서문지 앞에 영성자성이란 표지판이 있다.

한편 영성자촌은 10만 명이 거주하면서 항쟁하기에는 다소 작으므로 만주 대석교 인근의 해룡천산성이 안시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산성을 견고하게 쌓은 것은 물론 둘레의 길이가 3000여미터나 되어 1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영성자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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