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재호] 지역사 발굴과 민간기록연구가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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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재호] 지역사 발굴과 민간기록연구가 양성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11.24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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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 최고의 발명은 문자 발명이었다. 그리고 문자는 문명을 낳았다.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중국 황하 문명 등 4대 문명은 모두 고대 문자 발생지다. 이후 문자는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지배층은 부와 권력, 그리고 문해 능력을 대물림했다.

역설적이게도 계급적 신분질서가 확고했던 조선에서 문자가 가진 권력의 속성에 도전한 사건이 터진다. 바로 1443년 한글 창제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한글은 창제 때부터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대표적 반대 인물인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우리 조선은 예부터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겨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행했습니다. 이제 언문(한글)을 창작하니 놀라움이 있습니다. 만일 명나라에서 혹시라도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이어서 오직 몽고서하여진일본과 서번이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라며 중국 글자가 아닌 고유 문자가 있는 나라는 모두 오랑캐 민족임을 강조했다.

세종이 삼강행실(三綱行實)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면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하자 집현전 학자 정창손은 삼강행실을 이미 반포했지만 충신과 효자 등이 나오지 않는 것은 사람의 자질 문제이지 문자를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지배층들이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한글이 배우기 쉽다는 점이었다. 최만리는 "28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면 누가 힘들게 성리의 학문을 배우려 하겠느냐"고 우려했다. 결국 조선 지배층들은 중화 중심 세계관에 갇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원천인 문자를 대대로 독점하고자 했던 것이다.

글을 아는 사람만 기록할 수 있어 기록이 곧 권력과도 같았던 시대에 기록자들은 지배층의 시선에서 우리 삶을 기록하고 역사화 했다. 때문에 민중의 삶과 동떨어진 기록이 비일비재했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군현 단위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제 문자와 기록이 곧 권력이었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난 것처럼 보였다. 요즘은 누구나 문자메시지카카오톡 등을 주고받으며 일상을 기록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신변잡기적인 발신만 난무한다는 것이다. 지역 조사를 위해 발굴한 마을 기록들도 대부분 행정의 통계자료다.

그런데 지식재산과 정보공유가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인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문자는 여전히 권력이다. 의미 있는 정보를 가진 모든 값인 데이터(data)’가 문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화 시대이자 지방분권화 시대인 오늘날 지역민들의 일상 기록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기록 자원들을 활용하는 아카이브 시스템 마련이 절실하다. 아카이브란 개인이나 단체가 남기는 기록물 중 가치가 있는 것을 선별해 보관하는 장소, 또는 그 기록물 자체를 말한다. 병원에 가면, 과거 진료차트를 수배해 찾아보게 되는데, 이 진료차트가 보관되어 있는 기록보관실도 아카이브라 할 수 있다.

지역사 기록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한 일부 지자체들은 공공기록물은 물론 민간 기록물 수집과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간기록연구가를 군 단위 최초로 채용한 충청북도 증평군의 경우 행정과 민간의 기록물을 따로 수집하고 있다. 순창군을 포함한 전국 지자체에도 기록연구사가 있지만 현재는 행정기록만 담당하고 있다.

군이 지역 내 기록물 수집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지역에 대한 자긍심으로 이어진다. 지역사 기록은 지역의 언어를 되찾는 일이다. 우리 지역은 전국 어느 지역 못지않게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구한말부터 치열하게 전개된 독립투쟁사, 한국전쟁을 전후한 회문산권의 비극, 판소리 명창들과 관련된 일화 등.

지역사에 대한 기록은 유명인이 아니라 일반 지역민들의 증언에 기대야 한다. 기록자는 역사의 현장에서 경험했던 증언자의 모든 것, 그동안 담론화 되지 못한 지역민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해야 한다. 현대사의 증인인 어르신들의 기억이 더 흐릿해지기 전에 격동의 지역사와 마을 내 인간사, 자연물 등에 대한 기록을 이어나가야 한다.

발굴된 1차 기록물을 어떻게 공개하고 활용할 것인가도 기록만큼 중요하다. 우리 군의 경우 그동안 문헌 등 문화유적에 대한 방대한 발굴과 연구가 있었다. 이를 좀 더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1차 기록물을 모든 지역민들이 접할 수 있도록 온오프라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전시된 기록물은 지역민의 상상력을 자극해 보는 사람의 숫자만큼 여러 생산물을 파생시킬 것이다. 이것이 활성화 되면 만화나 동영상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 생산으로 이어져 문화상품 형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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